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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기념비 앞에서의 연설 - 사탕 한알의 기적


버지니아 해병기념관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 앞에서 연설을 하는 순간,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는 대단한 성공이 예견됐다. 양의 동서와 때의 고금을 막론하고, 진심과 진실은 통한다는 말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67년 전, 미 해병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치렀습니다. 이 장진호 전투의 승리로 10만여 피난민을 구한 철수작전도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피난민 중에는 제 부모님도 계셨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이 흥남 철수선 빅토리호가 내려준 거제도에서 태어났다면서, 장진호 용사들이 없었다면 자신의 오늘도 없었을 것이라고 절절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이어진 항해 중 미 해병이 피난민 전원에게 사탕 한 알씩을 나눠줬다는 생생한 증언이야 말로 압권이었다.


“제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항해 도중 12월 24일, 미군들이 피난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사탕을 한 알씩 나눠줬다고 합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비록 사탕 한 알이지만 그 참혹한 전쟁 통에 그 많은 피난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눠준 따뜻한 마음씨가 저는 늘 고마웠습니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결론적으로 한미 동맹은 몇 장의 종이 위에 서명으로 맺어진 약속이 아니라, 포화 속에서 피로 맺어진 혈맹이라고 강조했다.


진심과 진실은 통하는 법, 문재인 대통령의 이 잔잔한 진심은 참전용사들을 비롯한 미국인들의 눈시울을 적셨고, 가슴을 흔들었다. 그리고 꽁꽁 닫혀 화까지 나 있다던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을 단박에 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장진호 사탕 한 알의 기적’이라고 할 만도 하다. 누가 방미 첫 행사로 장진호 기념비 방문을 생각했는지 그야말로 절묘했던 것이다.


현안이 명확했던 유일한 한미 정상회담


대한민국 건국 이래 약 60여 차례의 한미 정상회담이 있었다. 하지만 대개 지난 사대시절의 책봉사절이나 고명사절과 같은 성격, 다분히 의례적인 그리고 한마디로 말해 불평등한 만남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번처럼 현안이 명확하고 절실했던 적은 없었다. 일촉즉발의 북핵문제, 중국이 법석 떠는 사드문제, 당장 폐기할 것 같은 한미 FTA. 그리고 럭비공과 같아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트럼프의 성정. 모든 것이 지뢰밭과 같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제 출발한 지 두 달도 안 되었고, 조각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대통령은 방미길에 올라야 했던 것이다.


이번 방미를 앞두고 우리는 얼마나 걱정이 많았던가. 북핵 문제에 늘 강경한 입장인 트럼프가 사드 배치를 놓고 격노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북한에 대한 즉각 폭격 명령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사드를 빨리 가져가지 않으면, 또 그 비용을 전액 지불하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협박을 얼마나 당할까 노심초사해야 했었다. 조마조마 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장진호 사탕의 고백은 신의 한 수 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은 정작 군에 갔다 오지 않았으면서 고등학교 후반 과정을 군사학교에서 마쳤다는 것을 들어 군인정신이며 군생활의 경험을 몹시 중시하는 사람이란다. 해병대도 아니면서 ‘겅호’와 ‘셈퍼파이’를 입에 달고 산단다. 겅호와 셈퍼파이는 우리로 말하면 단결, 충성과 같은 미 해병대의 경례 구호다. 실제 겅호는 함께 갑시다. 셈퍼파이는 영원한 충성이라는 뜻이란다.


이런 트럼프에게 문대통령이 먼저 던진 사탕 한 알의 메시지는 만능키의 역할을 했다. 트럼프는 트위터를 통해 대통령의 연설을 들었을 테고, 가슴이 뭉클해져 옷장으로 달려가 파란색 타이를 골랐다. 백악관 앞 마당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 그윽한 친근한 미소를 던졌고, 다정하게 손을 맞잡으며, 어깨를 두드렸던 것이다. 실제 트럼프는 우리 대통령 보다 7살 위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만찬 도중에도 두 번이나 장진호 연설을 언급했고 계속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잡았다. 회담은 벌써 반쯤 성공했던 것이다.


최고의 화학적 결합 : 그레이트 케미스트리


문재인 대통령으로서는 이번 회의를 트럼프와의 개인적 신뢰 구축의 기회로 삼겠다는 당초 목표를 초반에 십분 이뤘던 셈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아주, 아주 좋다(very, very good)”, “매우 잘 맞는다(great chemistry)”라는 최상의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번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회담 때 악수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비롯, 다른 정상과의 만남에서 그가 보여줬던 기이한 장면과는 전혀 달랐다.


트럼프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얼마나 친근한 감정을 지니고 있고, 또 이를 감추려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백악관 브리핑룸 에서 수행기자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밀치다 책상 하나가 엎어질 뻔한 소동이 있었을 때였다.


“조심 조심, 대단히 친근한(?) 친구들인데 문 대통령 당신한테는 덤비지 못하도록 해”라고 했던 장면이었는 바, 워낙에도 미디어와 사이가 좋지 않은 그로서는 저돌적인 기자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어찌 할까 대뜸 걱정이 됐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트럼프는 우리 표현으로 화끈하게 깨 벗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회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다. 무엇보다 평화통일 분위기 조성을 위해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이 주목된다. 이른바 운전석 조수석 논란서 부시도 오바마도 내주지 않았던 운전석을 우리에게 다시 준 것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인도주의적 문제 등을 포함해 남북대화를 재개하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열망을 트럼프 대통령이 적극 지지한다는 내용까지 공동성명에 넣는 데 성공했다.


엄청난 성과 아닌가. 회담 직전 까지도 "북핵문제에 있어 더 이상의 인내는 없다"고 힘주어 강조했던 트럼프 아니었던가. 그리고 무엇보다 한·미·중 간 분쟁의 씨앗인 사드배치 문제를 우리 쪽 계획대로 그대로 진행할 수 있게 된 점은 운전석 차지 못지 않은 최대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사드문제는 더 이상 언급 하지 않아도 된다는 양 아예 의제에서 빠졌다. 가히 문재인 외교 라인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회담 전에 문정인 특보가 나서 ‘사드문제로 금이 간다면 그게 무슨 혈맹이고 동맹이냐’ 했던 것과 강경화 외교장관이 나서 ‘사드 배치에 대한 재협의는 생각지 않는다’는 강온 양면의 언급 또한 매우 적절한 사전 작업이었던 것이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한미 FTA 또한 '태산명동 서일필'


한미 FTA 문제 또한 미국의 입장에서는 태산명동 서일필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못됐으니 어떤 식으로 어떻게 한다는 정확한 표현 없이 달라져야 한다고만 했고 양쪽이 함께 노력한다고 결론 지어졌다.


내면을 들여다 보면 논의가 진행되면서 오히려 한·미 FTA가 일방적으로 한국에 유리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협정을 통해 미국의 수출도 괄목할 만큼 늘어났다는 점을 새롭게 인식시켰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는 자신들의 재정적자가 무역적자 때문이라고 했다가 자국 언론으로부터 무식하다고 뭇매를 맞기도 했다.


실제 미국의 적자가 엄청나다고 주장하나, 이는 자신들이 큰 폭의 흑자를 기록해 온 서비스 분야를 뺀 수치다. 서비스 분야는 FTA 발효 후 23%나 늘었다. 이런저런 반박 논리가 이번에 촘촘하게 대응됐다는 후문이다.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해서는 꼼꼼한 추후 대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문재인 대통령 또한 트럼프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서 그레이트 케미스트리 라는 표현을 재차 인용하면서 기대 이상으로 대단한 환대와 대접을 받았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삐져 나오기 마련이다. 문재인 대통령 특유의 고구마와 같은 진득한 진정성이 전혀 다른 케미스트리의 트럼프에게 그대로 통했던 것이 이번 정상회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 대통령의 진정성이야 말로 최대의 무기이기에 트럼프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컬럼을 통해 고언한 바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디 삼엄한 국제 외교 무대에서 순진하게 진심과 진정성이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진심과 진실은 언제나 통한다.


꼭 알려주고 싶은 에피소드 한 토막


81년 가을,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힝클리라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청년에게 총격을 당해 어깨에 총상을 입고 워싱턴 육군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그 무렵 레이건은 북극 곰이라는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세계평화를 위해 군축을 하자고 제안했었다. 하지만 일언지하 거절당했고 무례한 편지를 받은 직후였다.


수술을 끝낸 다음날 아침 레이건은 침대에 누워 간호 장교에게 브레즈네프에게 보내는 편지를 구술케 했다. '존경하는 서기장 각하' 쯤으로 시작 됐을 게다. 레이건은 이 편지에서 총상을 입은 자신의 심경을 피력했단다.


어젯밤의 총격이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와 심장에 맞았다면 자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으로 삶과 죽음이 백지 한 장 차이라면서 인생이란게 얼마나 허무하고 짧은 것인지 느끼게 됐다고 했고, 창밖에 새 우는 소리를 듣고 있는 자신이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지 그리고 희망에 차 있는지를 얘기했단다. 그리고는 정치가 뭔지 생각하는 자신의 소회를 편 뒤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무기의 축소며 평화 구축이라면서 함께 이를 위해 손을 맞잡자고 구구절절 어찌 보면 새로 태어나 각성한 소박한 노인네의 넋두리 같기도 한 심경을 그대로 적게 했다는 것이다.


꽤 장문의 편지였단다. 얼마 후 레이건 비서실장이며 헤이그 국무장관이 병실로 찾아오자 구술한 편지를 보여주면서 모스크바로 보내라고 했다. 그 편지를 본 두 사람은 ‘적국의 수괴’에게 이런 사적인 감정을 장황하게 보내면 안 된다고 펄쩍 뛰면서 반대를 했단다. 그래도 레이건의 태도가 워낙 완강했기에 얼마 만큼 잘라내고 표현이 바뀌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런 내용을 담은 레이건의 편지가 브레즈네프에게 전해졌다.


그 결과 데탕트 그리고 군축회담이 시작됐고, 이 데탕트는 브레즈네프의 후계자 고르바초프에게 확대, 전승되어 본격적인 소련의 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페레스트로이카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고 보면 레이건의 편지는 세계 역사를 바꾼 편지이기도 한 셈이다. 실제 레이건은 고르비에게도 여러 차례 감상적인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 때문에 고르비가 군축회담장이었던 몰타가 아닌 미국을 직접 방문하게 된다.


물론 꼭 편지 몇 통 때문에 소련과 고르비가 극적으로 변화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저간의 정치 경제적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르비는 85년 미국 방문에서 미국의 경제력 특히 국민 소비력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코스트코’ 류의 대형 할인 수퍼마켓을 방문했었는데 사람들이 저마다 식료품이며 가정용품들을 산더미처럼 사는 것을 보고 자신 때문에 쇼를 한다고 여기기도 해 매장에 있었던 뉴저지 어느 소도시의 한 우체국 직원의 집을 따라가 방문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때 고르비는 생산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하는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리게 됐다는 것이다.


고르비의 이런 페레스트로이카가 러시아 국민들이며 인류 전체에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귀결 됐는지 여부는 아직 판가름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꾼 것 만큼은 틀림 없다. 그때 레이건의 진심이 담긴 편지가 브레즈네프와 고르비에게 전해지지 않았다면 평화공존 데탕트가 시작될 수 없었고, 또 고르비가 그간의 관례를 깨고 미국으로 직접 날아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레이건의 그 편지는 사자의 눈물 격이 됐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날 아침의 진심과 진정이 담겨져 있었기에 의뭉한 북극곰과 고르비를 흔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역시 진심과 진실은 통한다는 얘기다.


이제 서울로 돌아온 문재인 대통령은 이틀 뒤에는 베를린으로 날아가 G20 정상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번 방미를 통해 멋지게 국제 무대에 데뷔한 여세를 몰아 그 특유의 ‘고구마 진정성’을 시진핑 주석을 비롯한 열강의 수뇌들에게 각인시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우리는 언제나 그런 자랑스런 대통령에게 박수칠 준비를 하고 있다.


→ NewBC 논평 : 안동일 뉴비씨 논설위원 - 노심초사 현안들 일거에 해결한 문 대통령에게 갈채를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