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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
아무리 기온의 변화가 18세 예비숙녀 감정의 변덕보다 더 심하다손 치더라도 3월의 끝자락을 향해 맹렬히 지나가고 오늘, 이렇게 갑자기 눈발이 날리는 건 또 뭐람?

그렇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내 속을 잘 긁으면서도 내게 가장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고 있는 꼬마(=아내를 부르는 호칭)가 갑자기 불문곡직하고 퇴근과 함께 무조건 잽싸게 달려오라는 내용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아마도 그때 모습을 거울로 비쳐 보았더라면 오리주둥이가 된 내 입술을 볼 수 있었으리라.

왜 그래야만 하냐고 조금은 겁 먹은 목소리로 물어 보았더니, 우리 꼬마 왈...

"아빠가 병원에 입원하셨어..."

이크! 이럴 땐 무조건 아부성 발언을 날림은 물론 칼 같이 꼬마한테 달려가는 것이 한 대라도 덜 버는 길이라는 걸 근 3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통해서 난 이미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

1호선 끄트머리 어디쯤에 회룡인지 쌍용인지 하는 "용"자 들어가는 전철역이 있고, 근처에 뭐라뭐라 하는 정형외과 하나가 있으니 그곳으로 오면 된다는 거다.
직원들에게 퇴근 지시를 해두고 구두발에 바람이 밟힐 만큼 열심히 달려 겨우 다다랐더니 저만치에서 두눈은 째리고 두 손은 허리에 '턱' 하니 올려 놓은 꼬마가 앙칼지게 맞아주었다.

"빨리 가자! 근데 저녁을 안먹어서 배 고프겠네?"

그 말과 함께 우리 꼬마의 눈꼬리는 언제 째렸냐는 듯 헤벌레하며 아래를 향해 시속 200킬로미터로 내려갔고, 내 심장은 안도의 박자를 맞추면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무튼 우리 꼬마, 먹는 거에는 무지하게 약하다는 걸 또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대충 과장된 목소리와 제스쳐를 동원해가며 병문안의 말씀을 가증스럽게 장인어른께 투하시켰더니 우리 꼬마 흐뭇한 웃음으로 즈그 신랑을 쳐다보았고, 그런 느낌은 220볼트 전기처럼이나 정확하게 내 피부에 전달 되었다.

그렇게 병문안을 마친 꼬마와 나는 역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로 들어가 통돼지 바베큐를 2인분과 소주를 주문했다. 한두 잔 술잔을 나누니 약간 붉그레진 꼬마가 한다는 말이...

"그래도 오빠가 최고다!"

자식! 배 부르고 알딸딸하니까 신랑이 예뻐 보인다 이건데, 그래도 좋아지는 기분 탓이었는지 술잔을 들이키는 속도에 가속패달을 밟았고, 결국 사고를 내게 되었다. 시흥에서 내려야 하는 꼬마와 내가 술기운과 피곤을 핑계거리 삼아 군포 근처까지 가버렸던 거다.

시간을 보니 전철도 버스도 이미 끊긴 것 같은 느낌, 여기서부터 이 시간에 택시를 타고 집까지 가려면 독사같은 우리 꼬마 속사포같은 닥달이 이어질 것은 불문가지였으니...

급히 역무원에게 알아 보니 그나마 다행인 것이 구로행 막차 한 대가 남아 있다는 것, 서둘러 반대편 승강장으로 건너가 늦지 않게 승차를 할 수 있엇다.

눈 내리는 다리를 넘어 벌벌 떨면서 집으로 오자마자 하는 일이라는 것은 보일러 온도 최대로 올림과 함께 침대 전기담요에 전기를 잽싸게 쏘아주는 것, 
그렇게 2001년 3월의 어느 하루가 추억으로 새겨지고 있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