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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마법이다. 스크린에 쏟아지는 찬란한 빛과 웅장한 사운드는 관객들의 마음을 울렸다 웃겼다 한다. 그런데 요즘 이 영화의 애간장을 태우게 하는 존재가 있다. 영화감독, 시나리오작가, 나아가 관객들의 마음까지 들었나 놨다 가지고 노는 진짜 요물, 그것은 바로 만화. 종이 위에 쓱쓱 그려낸 그림과 말풍선으로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예술. 지금 영화는 만화 없이는 못 살 것처럼 간절한 구애의 손길을 뻗고 있다.


만화, 영화인들에게 무궁한 상상력의 원천


출처 - 현대 모터스라인


지난 십 년간 만화 원작의 영화들이 스크린을 가득 채워왔다. <아파트>, <순정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등 강풀의 웹툰은 연재만 시작해도 감독과 제작자들의 판권 계약 요청에 시달린다. 허영만의 만화는 <식객>, <타짜> 같은 인기작뿐 아니라 1980년대의 <제7구단>까지 찾아내 영화 <미스터 고>로 재탄생됐다. 할리우드로 눈을 돌리면 스케일이 달라진다. 만약 만화원작이 없었다면 영화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기나 할까 싶다.

이 같은 현상은 베스트셀러 소설이 대부분 영화로 만들어지듯, 단순히 유명만화의 인기에 편승해 한몫 잡아보려는건 아닐까? 하지만 박찬욱의 <올드보이>, 프랭크 밀러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300>과 <씬 시티>, 봉준호의 <설국열차>는 비록 유명한 작품은 아니지만 특이한 소재와 새로운 감수성을 지닌 만화들을 당대의 가장 스타일리시한 영화로 재탄생시켰다. 이처럼 만화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원천으로 영화인들의 뜨거운 러브콜을 받고 있다.


도대체 왜 만화일까?


만화와 영화는 그 태생부터 친구이자 경쟁자로 자라왔다. 1902년 조르쥬 멜리에스(Georges Melies)가 만든 <달세계 여행>은 영화라는 발명품이 단순히 ‘움직이는 사진’이 아니라 연극이나 오페라처럼 이야기를 전하는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최초로 보여줬다. 그 이전의 영화들은 기차가 역에 도착하는 등의 실제 상황을 촬영한 기술적 영상에 불과했지만 이 작품은 인간이 로켓을 쏘아 달나라로 날아가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필름 속에 담아냈다. 재미있게도 멜리에스는 마술사이자 풍자 만화가였다. 이처럼 만화와 영화는 20세기의 마법으로 동시에 생명을 부여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스토리 영화의 대부분은 그저 연극무대를 관객석에서 찍어 올리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1905년 이러한 영화의 틀을 산산이 부숴버린 작품이 등장한다. 윈저 맥케이(Windsor McCay)의 <잠의 나라의 리틀 네모>라는 신문 만화였다.

‘네모’라는 소년은 꿈속에서 온갖 상상의 모험을 겪는다. 그가 누워 자던 침대는 두 다리를 쭈욱 펴고 일어나 빌딩숲을 걸어다니고, 아이는 마치 도시가 놀이동산인 양 지붕을 타고 돌아다닌다. 만화가는 이런 자유로운 상상력을 그리기위해 다양한 앵글과 창의적인 편집을 선보였고, 영화 제작자들은 이 기법을 스크린에 옮기려 애썼다. 반대로 영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연출법도 만화에 꾸준히 영향을 미쳤다. 만화와 영화의 경쟁과 협력은 1930년대 미국 만화,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할리우드 영화가 동시에 황금기를 맞도록 했다.


만화와 영화, 근친 관계에서 윈윈 관계로


영화는 이야기로 이루어진 많은 예술에서 소스를 뽑아온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레 미제라블>처럼 대문호의 장편소설, 그리고 셜록 홈즈와 괴도 루팡이 등장하는 추리 모험 장르도 특히 사랑을 받았다. 만화 역시 중요한 자양분이었는데, 사실 만화 원작의 영화는 오랫동안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만화와 영화의 근친관계가 오히려 부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 그림과 간략한 대사로 이루어진 만화는 외형적으로 보면 영화를 찍기 전에 장면을 구성하기 위해 그리는 스토리보드와 비슷하다. 그래서 만화책의 장면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기면 근사한 영화가 될 거라는 오해가 존재한다.


출처 - 현대 모터스라인


하지만 만화의 방대하고 오밀조밀한 이야기를 두 시간 전후의 영화로 만들면, 줄거리를 요약하기도 바쁘다. 만화의 과장된 설정이나 기법도 문제였다. 주인공이 두 발을 굴러 ‘피융’ 하고 하늘을 날고 땅에 떨어져 납작해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장면은 혼자서 낄낄대며 보는 만화책속에서는 괜찮지만 어른들이 잘 차려입고 찾아가는 영화관에서 보기엔 점잖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만화에 표현되는 SF나 초능력을 영화로 옮겨오면 기술적 한계때문에 애들 장난 같이 여겨지는 경향이 있어 만화 원작의 영화 상당수는 B급 취급을 받아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러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1990년대 후반 새롭게 도약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은 <매트릭스>처럼 화려한 볼거리를 보여줄 소재를 찾아 나서게 했다.

그리고 만화 속 슈퍼히어로들이 할리우드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팀 버튼감독의 <배트맨>에서부터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이 대성공을 거뒀고, 예술영화로 정평이 나있는 이안 감독까지 <헐크>로 슈퍼히어로 세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미국은 SF, 한국과 일본은 드라마만화


동아시아의 만화는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초능력 SF보다 생활 속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적인 만화가 인기다. 일본에서는 낚시에 빠진 가족의 일상을 담은 <못말리는 낚시광>이 매년 한 편씩 시리즈를 이어갔고, 마성의 매력으로 남자들을 홀린 뒤에 자신을 죽이게 만드는 호러 만화 <토미에>, 노트에 이름을 적으면 그가 죽게 되는 <데스 노트>; 같은 과격한 상상력의 작품들이 원작의 인기를 등에 업고 영상으로 옮겨졌다.

인기 만화의 상당수는 극장으로 자리이동할 때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다. 그런데 최근에는 만화 원작의 실사영화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여기에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과거 천박하게 여겨진 만화 속 과장된 설정, 가벼운 감수성, 독특한 언어 유희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반적인 문화가 되고, 만화 원작을 실사 영화로 만들어도 크게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됐다. 남파간첩이 변두리 동네에서 바보 흉내를 내며 산다는 설정의 웹툰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다소 엉뚱한 설정임에도 올해 초 영화화되어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꽃미남들이 동네 어귀에 만든 케이크 전문 가게를 그린 <서양골동양과자점> 같은 만화 원작의 영화는 10년 전이라면 작위적이라며 외면당했을 것이다.

최근 작품성과 흥행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아내는 만화 원작 영화들이 많이 나오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박찬욱, 봉준호, 최동훈등 40대의 영화감독, 시나리오작가들은 명랑만화의 전성기인 1970~19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며 꾸준히 만화를 보고 자라온 세대다. 그들은 <공포의 외인군단>, <각시탈>, <슬램덩크> 등에 감동하며 언젠가 영화로 만들겠다는 꿈을 꾸며 자라왔다.

<전국노래자랑>의 김인권 등 배우중에도 만화 팬들이 많다. 영화배우를 캐스팅할 때에도 딱딱한 글자로 가득한 시나리오보다는 원작 만화책을 보여주는 것이 설득에 용이하다고 한다. 감독이나 배우가 모두 만화와 함께 성장한 세대인 것이다.


성공하는 만화 원작 영화는 따로 있다


인기 만화를 영화로 만든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강풀의 웹툰들은 수많은 팬들의 지지 속에서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보통 원작 만화의 방대한 이야기를 러닝타임에 맞추는 과정에서 줄거리 요약에 허덕이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는 이런 이유로 <데스 노트>처럼 시리즈로 영화화하기도 하지만, 국내에서는 그런 긴 호흡의 투자가 어렵다. 게다가 원작의 재현에 너무 매달리면 정작 열혈 독자들은 “애걔, 만화에서 다 봤던 거네”라며 지루해한다.

최동훈 감독은 <타짜>를 영화화하면서 허영만-김세영 콤비의 탄탄한 이야기를 자신만의 설정으로 과감히 변신시켰다. 만화에서는 수십 년 전에 벌어진 이야기를 현대로 각색하고, 주연배우들의 특징에 맞게 새롭게 캐릭터를 창조했다. 김혜수가 맡은 정 마담은 영화에서 훨씬 비중이 커지며 생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할리우드에서 만화 원작 영화는 드라마적인 짜임새보다는 화려한 볼거리에 집중한다. 슈퍼맨, 배트맨 같은 슈퍼히어로가 펼치는 초능력을 거대한 스크린에서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도록 하는 것이다. 만화는 거의 혼자서 모든 걸 창조하는 1인 영상 예술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신의 상상력을 종이위에 옮겨 놓으면 된다. 주인공이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간다면? 영화라면 수십명 스태프의 항공료, 숙박, 체재비, 현지 코디네이션이 필요하다. 반면에 만화는 자료 사진를 보고 장면을 만들어낸다.

머나먼 행성들의 우주 전쟁을 그린다면? 영화는 천문학적인 컴퓨터 그래픽 예산이 들고, 그렇게 해도 성공 가능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만화는 작가의 머릿속에 있는 우주 비행선과 외계인들을 종이에 쓱쓱 그리면 된다.

때문에 만화와 영화는 영상예술이라는 같은 영역에서 초저예산의 1인 예술과 천문학적 예산의 기업 프로젝트가 공존하는 교집합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 현대 모터스라인, Text 이영석 만화평론가 ]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