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불혹을 넘긴 중년의 나이에 이르면 누구나 중·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가끔 그리움을 담은 미소를 지어보일 때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어쩌다 들려주시는 선생님의 '세상 이야기'에 빠져들 때면 '정말일까?' 싶은 궁금증과 신기함이 해일처럼 밀려오기도 했었지요.

지금도 사회과목을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을 비롯한 몇 분의 선생님들이 생각납니다. 교과서에서는 찾을 수 없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참 많이 들려주셨던 선생님들이셨죠. 물론 요즘 같은 학원식 수업방식이 보편화 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내신성적이나 대입수능과 무관한 수업이라 하여 징계를 거론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어느 날, 한 선생님께서는 카세트 플레이어 한 대를 들고 오시더니 미리 꼽혀져 있던 카세트 테이프를 들려주셨습니다. 잠시 웅성웅성하던 학생들은 카세트 플레이어를 통해 흘러나오는 어떤 목소리에 의해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선생님께서는 한 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두꺼워 보이는 책을 펼치셨지요. 50분 수업이 다 끝나도록 교실에서는 그 당시에 한창 이슈가 되고 있던 정치적·사회적 주제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 여러 명의 목소리만이 카세트 플레이어를 통해 흘러나왔을 뿐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군부"나 "파쇼", "독재", "노동자"와 같은 단어가 많았던 것으로 어렴풋이나마 기억납니다. 그렇게 몇몇 선생님들께서는 정치·경제·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것들에서부터 반 친구들이 가장 재미있어 했던 성에 대한 이야기까지 적절하게 수위를 조절해 가시면서 들려주셨습니다.

경제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는 나중에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도움이 되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진로소주에 대한 것인데 그 때 사회과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씀을 생각납니다.

"강력한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제품이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싸게 팔리고 있는데 '비꺼뚜로진"과 같은 몇몇 제품은 오히려 해외시장에서 더 비싸게 팔리고 있어. 앞으로 이런 제품이 더 많이 나와야 될 텐데 그 일을 너희들이 해야 되는 거야."도 앞으로 많이 나오게 하는 게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다."

지금도 오리온 쵸코파이, 농심 신라면, 한국야쿠르트 도시락 라면, 락앤락 밀폐용기와 같은 제품들은 나름대로 고가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소비자가격과 큰 차이는 없겠지만 현지 시장에서의 물가수준을 고려해 본다면 고가정책을 쓰고 있는 셈이니까요.


그런데 내수시장 소비자를 시쳇말로 '봉'으로 삼는 제품들도 많습니다. 국내 소비자를 통해 거둬들인 수익을 담보로 해외시장에서는 '굴욕' 수준의 가격을 책정하고 있는 제품들 때문에 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글로벌기업을 지향하고 있는 국내 기업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2010년, 오늘을 살아가는 국내 소비자를 대상으로 이젠 더 이상 애국심에 호소하거나 A/S와 같은 부차적인 편익만을 강조하면서 비싸게 팔 수는 없을 텐데 그 배포가 크다 못해 치를 떨게 하는 것이죠.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IT 업계나 자동차업계일 겁니다. 국내·외 소비자에게 판매할 때마다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는 휴대폰 제조업체의 퀄컴사에 대한 로열티나 GPS 관련업체의 인공위성 사용료와 같은 것는 기술특허에 대한 사용계약에 의한 것이니 어쩔 수 없다 하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해외로 수출하는 제품에 더 많은 기능과 옵션을 추가해 주고도 국내 소비자가보다 더 싸게 팔겠다는 행위는 울화를 돋우기에 충분한 일입니다.

"한국에서 통해야만 해외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말은 글로벌비즈니스를 실행하려는 해외의 기업들에게는 미이 진리가 되어버린 말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말이 가능하게 된 이면에는 우리나라 소비시장에서 실패를 경험한 세계적인 유통체인이나 거대자본의 해외 보험사 등의 사례가 남아있기 때문일 겁니다. 또한 우리나라 소비시장을 모델로 하여 성공한 기업들의 사례에서도 나타났기 때문일 테죠. [관련 포스트 : 글로벌비즈니스 정석, "한국에서 통했어?"]

최근 뉴욕타임즈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으로 뉴스를 보도했습니다. 글로벌 그룹들이 한국을 테스트마켓으로 주목하고 있는 이유가 깐깐한 한국 소비자들이 만족을 해야만이 다른 나라에서도 잘 팔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글로벌기업인 로레알이나 필립스, 니콘 등이 한국을 새로운 상품과 아이디어 시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례를 다루었지요.

그런데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내보낸 갤럭시탭에 관한 뉴스[를 보고 있자니 얼굴이 확 달아 오르더랍니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그동안 얼마나 비싼 가격으로 휴대폰이나 모바일 기기를 구입해 왔으면 이런 뉴스가 나왔을까 싶더군요. 해당 기업이 주장하고 있는 국내 소비자가가 더 비싼 이유를 몇 번이나 읽어보았지만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내용 뿐이었고요. [관련 기사 : Galaxy Tab More Expensive at Home Than U.S.]

우리나라에서 기업하기 참 힘들다고 합니다. 불탄도 그 말에는 지극히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글로벌기업을 지향하고 있는 몇몇 기업들에게는 우리나라처럼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사내 직원들에게 할당량을 주고 판매를 강제할 수 있으니 좋은 것이고, 자국 소비자에게 비싸게 팔아 거둬들인 수익으로 해외시장에서 선심성 판촉활동을 할 수 있으니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그만큼 수월해지는 거겠지요.

정부의 친서민정책과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부자감세'에 관한 논란이 국민을 무서워하지 않는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면, 우리나라 글로벌기업들이 갖고 있는 국내 소비자에 대한 정책 역시 마찬가지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국내 소비자에 대한 존중을 조금이나마 기대하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