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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무렵.

잔잔하던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져만 가고 있다.
키작은 하늘은 빌딩 꼭대기 층까지 내려왔고, 이내 후두둑 빗방울로 가라 앉았다. 간식으로 배고픔을 잠시 달래고 마지막 업무일지에 사인을 하는 순간, 비로소 하루의 업무를 마감했다는 여유로움이 잠시 긴장의 끈을 놓게 만든다.
 
전철을 타면서, 사장실에서 얻어낸 "마음 사냥꾼" 2권의 첫장을 넘기려니 하루의 수고로움을 힘겹게 위로한 듯한 직장인 얼굴에는 반주로 걸쳤을 법한 술기운이 비 내리는 도시의 빛깔과 곱게 어우러져 보인다.

오늘도 힘든 하루를 보냈던 나 역시 저들 처럼 간단한 위로주가 간절하기에 읽어가던 책을 덮으며 집앞 상설할인매장에서 "소주 한 병 사들고 가야지..." 유혹을 받는다. 낯익은 가게 주인의 인사를 받으며 봉투에 담은 것은 소주 한병. 은행에 들르지 못해 낯돈 밖에 없었기에 두 딸의 간식거리는 생략하기로 했다.

초인종이 없는 우리집, 밖에서 일하고 돌아왔음을 알릴 수 있는 아빠의 유일한 수단은 "두드림"이다. '똑. 똑. 똑.' - 문을 열어 달라는 의사표현이 손가락이 만든 소리로 정확하게 전달되었는지 문이 열리면서 모습을 드러낸 큰 딸 예린이가 어른스럽게 말을 건넨다.

"아빠. 비 마이 와찌? 어이구 어떠케..."

이어 나타난 둘째 딸 역시 언니 말투를 흉내라도 내려는 건지 "아빠 아빠. 비가 마이 이쯔꾸 어쭈케...?"라고 하는데, 
그 말이 어찌나 듣기 좋고 유쾌하던지 "하하..." 웃음소리를 낸다. 괜스레 애기 엄마도 들으라고 한마디 거드는 것도 잊지 않은 채.
 
"아고... 고마와요. 우리 두 공주가 엄마보다 낫네요. 이렇게 비가 온다고 걱정부터 해주시니 아빠는 너무 너무 고마와요."
 
그런 아빠의 말이 싫지만은 않았던지 웃음 머금은 애기 엄마 입에서도 뾰족한 한마디가 튀어 나온다.

"닭개장 끓여 놨는데... 그렇잖아도 소주 한잔 드시라고 전화드릴려고 했어요"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그 힘들고 외로운 아빠로 살아간다는 것, 직장에서의 힘든 상황도 눈물겹게 참아내야 하는 남편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래도 그건 별것이 아니다. 이렇듯 아빠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있게 하고, 이렇듯 직장에서 또는 이 사회에서 리더로서의 역할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지게 하는 나만의 운명적이며 전략적인 파트너들이 있으니 말이다.

예린아, 예진아. 아빠는 말이다.

지금이 어렵다는 것은 아빠 스스로 알고 있지만 이보다 훨씬 불가항력적인 어려움이 아빠의 심신에 엄습해 오더라도 아빠가 가는 길이 옳고, 그 길이 옳다는 것을 엄마와 너희가 알아 준다면 무섭거나 두려운 것은 하나도 없단다. 아빠가 살아가는 이유... 그 단 하나의 가치는 바로 엄마와 함께 너희 예린이랑 예진이 뿐이니까....


- 060706. 아빠가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