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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 녘 학원골목은 언제나 부산하다. 그렇잖아도 바삐 떼는 걸음에 채근하던 터인지라 자꾸만 부딪치는 인파가 영 못마땅할 뿐이다. 저기 몇 걸음 앞, 음악다방 수정의 불빛이 보인다. 그마만치 마음은 조급해지고, 얼굴은 점점 달아오른다. '혹시 그냥 갔으면 어떡하지?'

다방 문을 열면 워럭하고 달려드는 귀멍멍이 음악과 굴뚝 같은 담배연기, 매번 겪는 일이지만 잠깐동안 흠칫하지 않을 수 없다. 낮은 실내 조명에 적응하길 기다기다 쭈욱 훑어 보는 시야 저편에 익숙한 형체가 들어온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가장 구석진 테이블을 앞에 둔 채 오두마니 앉아 있다.

엉덩이 먼저 쭈욱 밀며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메뉴판을 내려놓은 여자가 껍 씹던 입은 다문 채 눈으로만 묻는다. 뭘 시킬 거냐는 것이겠지. 습관적으로 먹지도 않을 커피 한 잔을 큰 소리로 주문한다. "아, 참! 블랙으로 갖다 줘요" 염병, 식으면 더 써져서 결국에는 마시지도 못할 것을…

요행히 잘 알고 지내는 DJ형과 눈을 맞추고 느긋하게 담배를 한 개피 빼어 물자, 기다리던 음악이 흘러나온다.

"나, 이 노래 싫어"
- 왜"

"꼭 내 이야기 같잖아. 이름도 똑같고…"
- "그래서 DJ한테 신청한 건데? 광분의 레이저 빔까지 쏘아가며. 아! 근데 눈깔에 너무 힘 줬나 보다. 빠질만큼 아프다"

푸하하하, 웃는다. 하얀 피부의 그녀가 웃을 때면 늘 갈증이 난다. 뜨거운 커피로도, 얼음이 절반인 콜라로도, 살짝 데운 우유로도 도저히 이놈의 갈증은 잦아들지 않는다.



 

 


'겨울이야기'

기타 반주에 맞춰
마치 혼잣말이라도 하는 듯
낮게 읊조리는 노래

1971년 -
가수 이장희가 만들었다는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그리움 한켠으로 밀려난 노래

노량진 음악다방 '수정'에서만
감상할 수 있었던 바로 그 노래

아마도 1984년 이른 겨울부터
이듬해 늦은 겨울까지였을  거야

아! 언제 다시 들어 볼 수 있을까

같은 형식의 음반에는
'성산포시인'이란 것도 있었어
이 모두를 들려준 DJ를 알게 된 것 -
정녕 내게는 행운이었지

제 연인의 이름은 경아였습니다.

나는 언제고 경아가 아이스크림 먹는 것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제가 경아의 화난 표정을 본 적이 있을까요.
경아는 언제든 저를 보면 유충처럼 하얗게 웃었습니다.

언젠가 저는 경아의 웃음을 보며
얼핏 그 애가 치약거품을 물고 있는 듯한 착각을 받았습니다.

부드럽고 상냥한 아이스크림을 핥는
풍요한 그대의 눈빛을 보고싶다는 나의 자그마한 소망은
이상하게도 추위를 잘타는 그애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우리가 만난 것은 이른 겨울이었고
우리가 헤어진 것은 늦은 겨울이었으니
우리는 발가벗은 두 나목처럼
온통 겨울에 열린 쓸쓸한 파시장을 종일토록 헤매인
두 마리의 길 잃은 오리새끼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거리는 얼어붙어 쌩쌩이며
찬 회색의 겨울바람을 겨우 내내 불어 재꼈으나
나는 여느 때의 겨울처럼
발이 시려서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경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모든 봄이건 여름이건 가을이건 겨울이건
언제든 추워하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따스한 봄이라는 것은
기차를 타고 가서 저 이름 모를 역에 내렸을 때나 맞을 수 있는
요원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는 빙하가 깔린 시베리아의 역사에서 만난
길 잃은 한쌍의 피난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에도 줄 수 있는 것은 열 아홉살의 뜨거운 체온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외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그 겨울을 춥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은
나의 체온엔 경아의 체온이 경아의 체온엔 나의 체온이 합쳐져서
그 추위만큼의 추위를 녹였기 때문입니다.

경아는 내게 너무 황홀한 연인이었습니다.

경아는 그 긴 겨울에 골목 입구에서부터 끝까지
외투도 없이 내 곁을 동행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봄이 오자 마치 우린 약속이나 한 듯 헤어졌습니다.

그것 뿐입니다.



음악이 끝날 무렵 다시 그녀의 입술이 열린다.

"단지 그것 뿐일까?" 
- "뭐가?"

"아니, 그냥 사귀다 그렇게 둘이 돌아서면 헤어지게 되고, 헤어지면 그냥 그 뿐인 게 되는 거냐고."
- "글쎄, 안 그렇겠지. 그냥 그 뿐인 게 어딨겠어? 글고 안 헤어지면 되지."

겨울이야기-이장희 옴니버스 음반

"니가 좋아하는 노래들은 다 이별 노래인 거 알고나 있니?"
- "응? 그랬어? 그냥 노래 가사가 좋잖아. 애달프고, 절절하고, 쉽게 누구씨가 생각나고…"

"난 슬픈 노래가 싫어. 가사대로 진짜 그렇게 될까 봐"
- "……"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속으로만 우물댄다. '넌 만나는 날부터 이미 헤어질 생각부터 하고 있었잖아. 늘 그래. 너와는 어떤 얘기를 해도 마무리는 항상 이별이었어. 넌 그러면서 왜 나한테만 그러지 말라는 거니? 나 널 만날수록 좋아하게 될수록 겁 나. 니가 떠날까 봐'

애써 웃어보이며 담배 한 개피를 다시 꺼내 문다. 그녀의 손이 테이블 위 1회용 라이터를 향하더니 불 붙이기 좋은 위치에서 멈춘다. 눈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 하고는 길게 한 모금 들이마신다. 천천히 내뱉아진 연기가 그녀의 귓가에서 흩어진다. 어쩌면 좀 전의 혼잣말을 그녀에게 다 이르고 있는 건 아닐까?

이미 짙게 내려앉은 노량진의 어둠이 흑석동에 이르러선 술을 부른다. 걸음이 통나무 민속주점 앞에서 멈추자 잠깐 사이 그녀의 눈에서는 놀라룸이 묻어난다. 이내 앞장 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 오늘따라 더욱 작아 보인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