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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래발전연구원에 기고한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단비칼럼65호(2015.10.13) - "학문과 학생 살리려면 교과서 국정화 안된다" - 은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이 획책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가 얼마나 무식한지, 나아가 얼마나 비극적이면서도 코미디 같은 것인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학사 교과서 채택률 0%의 이유


정부가 역사교과서를 국가에서 만든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되면 학교에서는 다른 역사책은 사라진다. 아무리 내용이 좋고 인기가 있어도 국가에서 만든 것이 아니면 교과서가 될 수 없다. 교과서 선택권은 국가가 독점하고 교과서로 수업하는 선생님과 학생의 선택권은 배제된다.

정부 여당은 국민대통합을 위해서는 국정교과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역사 교육을 통해서 올바른 국가관과 균형잡힌 역사의식을 길러 주기 위해서” 그리고 “정부의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에 많은 사실오류와 이념적 편향성 논란이 있는 내용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부의 공식입장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단행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의 말이다.

지금까지는 검정제였다. 검정제는 여러 곳에서 교과서를 만들고 국가는 이 교과서가 기준에 맞는지만 심사하는 제도이다. 검정제 하에서도 국가는 집필기준, 편수용어, 검정기준, 수정명령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교과서를 검사했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였다. 이렇게 지금까지 국가는 교과서의 품질을 간섭하고 견제하고 한편으로는 보장해 왔다.

여기서부터 모순이 발생한다. 지금까지 교과서에 문제가 많았다는 교육부의 주장은 교육부가 제대로 검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교육부가 역사교과서의 품질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혹은 품질검사를 할 능력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반성이나 원인분석은 하지 않고 교육부가 직접 교과서를 만든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건물 준공검사를 하는 공무원이 건물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직접 건물을 짓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런 모순은 이미 경험했다. 2013년 교학사 교과서가 그 예이다. 이 교과서는 뉴라이트 계열이 총력을 기울여 만들었다. 그러나 이 교과서는 함량미달이었다. 친일·독재 미화라는 극우적 역사관에다 사실관계 오류로 ‘불량 교과서’였던 것이다. 근현대사뿐 아니라 고대사 부분에서도 50쪽 분량에서 70여개의 오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교과서의 채택률은 0%대였다. 시장, 구체적으로 선생님과 학생들에게서 철저하게 배제된 것이다.


창의성·다양성·국제화 시대에 학생을 물건 취급하는 국정교과서


이미지 출처 - 미디어오늘



국정교과서는 다양화시대, 인권시대에 역행하는 선택이다. 창의성, 독창성이 요구되는 다양화시대, 국제화시대에 나라에서 만든 단 하나의 교과서로 공부한다는 것은 독재시대를 연상시킨다. 국정교과서 체제에서 우리 학생들은 단 하나의 내용만 배우게 된다. 하지만 다른 나라 학생들은 수많은 역사책을 통해 다양한 내용을 배운다. 누가 더 잘 판단하고, 더 세상에 잘 적응하고, 더 창조적일까?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과거회귀적인 교과서로 공부한 학생들이 국제회의에서 당당하게 다른 나라 친구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OECD국가 중에서 국정교과서를 채택한 나라가 터키, 그리스, 아이슬란드 등 세 곳인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더 철학적인 문제가 있다. 국정교과서는 학생들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 단 하나의 지식만을 주입함으로써 학생들을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고 본다. 국정교과서는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행동하는 능동적인 주체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국정교과서는 오로지 학생들을 주는 대로 공부해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만 본다.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온전한 인격체, 온전한 능동적 주체인 학생을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순간, 학생은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물건이 되어 버린다. 집단이나 국가의 사상을 강요하고 이 사상에서 벗어나면 체벌과 징계를 가한다. 먼 이야기가 아니다. 일제의 식민지 교육, 유신독재 시절의 교육이 이런 구조였다.

교육으로 사실을 왜곡시킬 수는 없다. 아무리 강요하더라도 현실은 그대로 존재하는 법이다. 일제가 내선일체, 조선인이 일본인과 평등하다고 선전해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유신독재 시절 정부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선전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위헌적인 긴급조치에 기반한 폭력적 통치가 있었을 뿐이다. 중학생, 고등학생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현실을 알 권리가 있다.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다. 학생 역시 민주시민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이런 행동을 한 학생은 독립투사가 되었다. 독재시대 이런 행동을 한 학생은 민주투사가 되었다.

국정교과서는 학생들의 주체성, 능동성, 창의성, 독창성, 정의감을 갉아 먹는다. 더 자유롭고 더 비판적이고 더 창의적인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다. 국정교과서는 교육의 본질에도 어긋난다.


역사는 국가중심 아닌 인권·민주, 자유·평화의 보편적 가치 지향하는 것


학문은 국가의 틀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한다. 역사 역시 학문의 일종이므로 진리를 추구한다. 진리는 시대를 묻지 않고 나라를 묻지 않는다. 한국의 진리가 일본, 중국, 미국에서도 진리여야 한다.

식민과 침략전쟁, 독재와 국가폭력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점은 전세계 어디에나 같다. 침략전쟁, 집단학살, 인권침해를 승자가 저질렀다고 범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승자의 역사만을 역사로 보는 시각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다. 우리가 일본에 대하여 올바른 역사교육을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도 같다. 보편적인 가치에 부응하는 역사서술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에게만 통용되는 협소한 가치관으로 역사를 서술해서는 안된다. 다른 국가와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공동의 역사관이 필요하다. 이 역사관은 보편적인 가치에 기초해야 한다. 이 시대의 보편적인 가치는 인권, 민주주의, 자유, 평화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 통일이라는 가치도 포함될 수 있다. 통일은 특수하지만 보편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러한 보편적인 가치가 아닌 국가 중심의, 그것도 자국민 우선의 역사관은 필연적으로 인권과 민주주의, 자유와 평화를 해친다. 승자 우선의 역사관도 같다. 청일전쟁 이후 지금까지 동아시아에서 평화체제가 마련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동아시아 각국이 보편적인 가치를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장 한국, 일본, 중국이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두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지 않은가? 인권과 민주, 자유와 평화라는 보편적인 가치에 기초하지 않은 역사, 국가관만을 강조하는 역사는 그만큼 위험하다.


검정도 제대로 못하는 정부가 ‘졸속’ 국정교과서 하겠다니


이미지 출처 - 국민일보



학생의 주체성이라는 측면에서도, 학문의 보편성이라는 측면에서도 국정교과서 추진은 역주행이다. 교육부의 발표대로라면 검정도 제대로 못하는 교육부가 교과서를 만든다고 하니 더 위험하다.

그런데 여기에 걱정이 하나 더 있다. 졸속의 위험이다. 지금까지 정부의 행태로 볼 때 교과서 집필에 필요한 최소한의 절차나 시간을 생략하고 당장 교과서를 내 놓으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정상적인 절차를 밟기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기존의 교과서를 기초로 할 수밖에 없는데 채택률 0%인 교학사 교과서를 기초로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그런데 이렇게 되면 다시 코미디가 된다. 이미 시장에서 불가판정을 받은 불량품을 국가의 힘으로 유통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무식과 비극, 코미디가 공존하는 국정교과서 파동이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