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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에세이] 땅콩 껍질 속의 사랑 V2 - 18회

어젯밤 밤 11시. 컴퓨터 앞에서 뭔가를 한참 하고 있는데 ‘쏴아~’하는 물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상황을 살펴보았더니 아내가 욕조며 다라(?)에 물을 받고 있는 것이 보였지요. 이 시간에 손빨래나 이불빨래라도 하려고 그러나 싶어 물어봤습니다.

“왜 이 야심한 밤에 물을 받고 그래?”
“네~. 내일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사창동 전체가 단수라고 하네요.”
“응. 그래? 근데 웬 물을 그렇게 많이 받는 건데?”
“물이 안 나온다니까 미리 넉넉하게 받아놓는 거죠.”
“응?”

비록 엄동설한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추운 날씨라 찬물로 샤워할 일도 없을 텐데 필요 이상의 물을 받아놓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심 속으로만 구시렁구시렁댔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이 되었죠.

아내는 일찌감치 아이들을 깨워 미리 따뜻한 물로 씻기고 난 다음에 늦잠에 빠져 있는 불탄을 깨우면서 빨리 씻으라고 들볶아댑니다. 늦으면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서 말이죠. 귀찮기는 했지만 하루라도 샴푸를 하지 않으면 머리에 떡이 지고, 개기름이 좔좔 흐르며, 가려움을 많이 느끼는 저로서는 별다른 항변을 하지도 못한 채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까지 후딱 해치워버렸습니다.

주말에는 아이들을 본가에 맡깁니다. 주말에도 근무하는 아내는 아이들이 주말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가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저보다는 할머니가 돌봐 주시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을 하는가 봅니다. 물론 저를 편하게 쉬게 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라는 야무진 착각도 가져봅니다. 어쨌든 지금은 편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고 있습니다.

아! 그게 아니군요.

워낙에 존재감이 없어 미처 생각해내지 못했던 막내처남이 두 달 전부터 아이들 방을 점령해 쓰고 있다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지금은 조용한 것을 보니 한참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나 봅니다. 어제는 금요일이었으니까 아마도 오늘 새벽까지는 PC방에서 서든어택을 하다가 왔을 겁니다. 팀으로 경기를 하는 서든어택에 별 2개의 계급을 가지고 있는 막내처남도 한 팀에 소속되어 있는데 그 팀원들의 수준이 거의 준프로급(막내처남의 계급은 별 2개로 소장이고요) 이상이라 하더군요. TV에서보면 e-스포츠 선수들이 경기를 위해 자신이 사용하는 키보드와 마우스가 들어있는 가방을 메고 다니는 것처럼 20년도 더 차이 나는 아들 같은 막내처남 역시 체리키보드가 담겨진 가방을 항상 어깨에 메고 다닙니다. 오늘도 오후 늦게까지 시체처럼 잠만 자다가 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고는 또 PC방으로 달려 갈 것 같습니다.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해서 화장실로 급행했습니다. 잠시 후 변기의 물을 내리니 ‘헉 !!’ 레버가 겉돌고 있네요. 아~! 오늘은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날입니다. 다라(?)에 받힌 물을 통째로 들고 적당한 양을 부어서 처리를 깔끔하게 하고 나왔지요.

커피 생각이 갑자기 간절해집니다. 봉지커피 두 개를 가위로 잘라 커다란 머그잔에 넣으며 물을 끓이기 위해 싱크대의 수도를 열었더니 오바이트라도 하는 것처럼 수도꼭지는 '왈칵~' 소리와 함께 녹물을 조금 뱉어냅니다. 곧이어 열려있던 수도는 계속해서 ‘커~’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마치 공포물에 나오는 괴물의 소리라도 되는 양 몹시 음산하기까지 합니다. 머그잔에 담겨있는 커피믹스가루를 보면서 쓴맛을 다시다가 혹시나 하고 찜솥을 열어보니 맑은 물이 찰랑대며 흔들리고 있습니다. 주방으로 나 있는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 무척이나 반갑기만 합니다. 어? 거기에다가 가스렌지 옆에는 조그마한 컵라면도 두 개가 놓여 있네요.

그렇군요. 어젯밤 늦게 퇴근해 온 아내가 욕조와 다라(?)에 물을 받아놓고, 찜솥에 물을 받아놓은 것이 다 나름대로의 용도에 맞춰놓은 거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혼자 속으로 구시렁구시렁댔던 것이 못내 미안해지고 또 부끄러워집니다. 그나마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커피는 마시지 않으면 그만이고, 또 정 마시고 싶으면 그 맛은 좀 이상해질 수 있겠지만 냉장고에 있는 보리차를 끓여서 마셔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용변을 보고 난 다음의 처리는 정말로 난감했을 것 같군요. 그것도 용무가 있는 사람이 저 혼자만이 아니라 지금은 시체처럼 잠만 자고 있지만 언제고 다시 깨어나서 빨빨거리고 다닐 막내처남까지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니 더욱 아내에게 고마워지는 날입니다. 해서 오늘은 아이들도 본가에서 잠을 자게 될 터이니 오랜만에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단수를 핑계 삼아 부부만의 외식을 권해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갑자기 생각이 나질 않는군요. 불탄은 참 멋대가리 없는 남편인가 봅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