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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뭔 날이게요?'

저녁 아홉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휴대폰으로 문자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잠들지 않고 아빠와 더 놀려는 두 아이와 내일 유치원 등원을 위해 억지로라도 재우려 하는 제가 팽팽한 기싸움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 아빠 핸드폰 울리는 거죠?"
"으... 응? 그러니?"

액정을 통해 보여지는 발신자는 아이들 이름으로 호칭해 놓은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갑자기 듣게 된 질문인지라 더욱 감을 잡지 못했을 겁니다. 답이 나올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하고 아이들에게도 물어보았습니다.

"얘들아. 오늘이 뭔 날인 지 너희 아니?"

큰아이가 월요일이라고 합니다. 작은애는 오늘은 모르겠지만 내일은 유치원에 체육복 입고 가는 날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네요.

"응. 그렇구나"

힘없이 대답을 하고 달력을 보니 오늘이 말일입니다. 순간 무슨 날인지 알게 되었고, 제 입꼬리가 귀로 걸려가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아내에게 당연히 그것도 모르겠냐는 듯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합니다.





'급여날? 어서 들어와. 한달 동안 수고했어.'

조금만 늦게 SEND 키를 눌렀더라면 좋았을 텐데...... 작성한 문자를 이제 막 전송시키자마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마도 막내처남일 것이 분명합니다. 누군가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면서 들어오던 막내처남은 송화기 쪽을 손으로 막으며 "누나가 나오시라는데요?"라는 아내의 메시지를 재차 전해줍니다.

아! 아내는 월급을 받았다고 술이라도 한 잔 같이 하고 싶었나 봅니다. 허나 아이들의 눈이 아직까지는 아주 쌩쌩하게 살아있습니다. 섣불리 움직이기 위해 발을 빼거나 전화통화를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젠 제법 눈치가 빨라진 아이들이 먼저 나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함께 따라 나서겠다고 고집이라도 피우게 된다면 외출은 포기해야 되겠지요. 감기를 달고 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거리로 나선다면 이 시간의 찬바람은 분명히 독이 될 것입니다. 거기다가 매일 밤 아홉시에는 잠을 자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는 아이들을 괜히 고생시킬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아침에 억지로 깨우면 일어나기는 할 것이고, 비록 힘은 들겠지만 하루 정도는 유치원 생활도 해낼 수 있겠지만 일부러 사서 고생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여러 모로 보아 그냥 재우는 것이 더 낫겠다 싶습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끝낸 막내처남이 PC방으로 새는 것을 아내가 원천봉쇄한 모양입니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잠자리에서 깨어 아빠와 엄마를 찾으며 무서워할 지 모를 일이기에 보초병으로 붙여둔 모양입니다.

서너 달 전 쯤에도 아내가 밖에서 데이트를 원하는 문자를 보내왔었는데 그 때는 막내처남이 이곳에 없었을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한 저는 아이들과 소통을 하기 위해 비치해 놓은 칠판에다가 "얘들아! 잠에서 깨면 엄마한테 전화해" 라는 글을 남기며 제 휴대폰을 칠판 옆에다 두고 집을 나섰던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날은 길거리에서 채 10분도 버티지 못하고 연거푸 걸려오는 작은애의 전화로 인해 도로 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요. 아이들은 분명히 잠을 자면서도 아빠 엄마가 집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묘한 안테나가 있나 봅니다.

"아빠. 화장실 갔다 올께"

이제는 눈이 반쯤 감겨가는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고는 얼른 휴대폰을 들고 화장실로 뛰어듭니다. 혹시라도 말소리가 새어나가면 안되었기에 초고속으로 문자를 보냅니다. 아이들 재워놓고 나갈 테니 어디 먼저 들어가서 위치만 문자로 남겨달라고 말입니다.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한 다음 막내처남에게 다시 한 번 아이들에 대한 것을 당부하고 집을 나서며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어느새 문자가 들어와 있습니다.

어? 음식의 맛과 양에 비해 턱없이 비싸다고 하는 로바다야끼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문자입니다.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지요.

"응. 난데. 음식 시켰어?"
"아니요. 오면 시킬려고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나 거기 싫어. 다른 데 가."
"벌써 들어왔는데 어떻게 나가요?"
"음식이 맘에 안들면 엽차를 먹다가도 나갈 수 있는 거고 물수건으로 손까지 닦고 나서도 나갈 수 있는 거야. 왜 그래?"
"그래도......"
"얼른 나와. 넌 왜 그렇게 점점 바보가 되는 거니?"

좋아하지 않는 메뉴만 있는 음식점에 잘못 들어가도 종업원의 눈치 때문에 그냥 나오지 못하고 아무 거나 주문을 하고, 또 그게 아까우니까 억지로 먹는 아내입니다. 아이를 둘이나 낳았으면 변할 법도 할 터인데 아직까지도 그 천성은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러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그런 아내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낀 저는 좋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습니다.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하면서 서둘러 나오라는 행동관리요령(?)까지 일러주면서 지난 여름의 막바지 즈음에 갔었던 곳으로 다시 약속을 정합니다.

도착을 해서보니 메뉴판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눈으로 힐끗 쳐다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것이 좀전에 소리지른 남편에게 앙금이 남아있나 봅니다. 미안한 마음에 괜히 화장실을 들렀다가 나오니 뭔가를 시켰나 봅니다.

"먹고 싶은 걸로 시켰어?"
"네. 알탕 시켰어요"

지금까지는 아이들 때문에라도 자극적인 음식은 피해야 했습니다. 언제나 아이들 위주로 식단을 차려야 했고, 음식을 주문해야 했으니 말입니다. 조용히 말을 꺼내는 아내가 로바다야끼로 자리를 잡으려 한 이유도 매콤한 알탕이 먹고 싶어서였다고 합니다. 어쩌다 한번 있는 이런 자리를 부드럽게 다독였어야 했을 텐데 무작정 소리부터 지른 것 같아 연신 무안한 마음에 헛기침만 하게 됩니다. 남편과 오랜만에 마주한 자리에서 어떤 음식이고 간에 맛있게 먹고 싶어서 저녁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니와 알을 꺼내 콩나물에 싸서 고추냉이간장에 열심히 찍어먹는 아내의 모습이 짠해 보입니다. 공기밥을 시켜서 같이 먹으라고 하니 그건 싫다고 하네요. 주인인 듯한 사람을 불러서 알탕에 넣어 먹을 수 있는 수제비 같은 사리가 있는지 물어봅니다. 안타깝게도 우동사리밖에 없다고 하길래 그거라도 괜찮겠다 싶어 주문을 넣습니다.





생맥주 500cc와 소주 한병을 나눠 마시는 동안 참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입을 달고 있다는 생각마저도 버린 채 온전히 열어놓은 귀로 듣기만 했습니다. 직장에서 생긴 에피소드라며 꺼낸 이야기도 한참을 듣다 보니 에피소드가 아니라 비치지 않으려 애쓰고는 있지만 근무에 대한 고생담입니다. 결국 아내의 눈에는 그렁그렁한 눈물이 보이더니 연신 냅킨으로 콧물을 닦아냅니다. 얼마간의 시간을 더 그렇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잔을 채워주며, 냅킨을 뽑아서 건네기도 합니다.

"그래. 고생했다. 아이들 깨기 전에 얼른 들어가자."

그 시간 동안 아내는 후련해졌을까요? 그래도 남편과 오랜만에 이야기도 하고, 술 한잔 나누었던 게 좋았을까요? 얼핏 보면 무척 행복해 보이는 것 같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는 발그스레한 얼굴에 웃음이 크게 올라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중간에 도넛 가게가 보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아이들에게 맛깔스러운 식사를 준비하지 못할 것 같은 아내를 위해 맛있어 보이는 도넛 몇 개를 골라봅니다. 잔잔히 흐르는 가로등에 비친 아내의 얼굴에 또다시 커다란 웃음이 걸려 있습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