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자' 아닌 '노비'의 아들? 금수저 박근혜 시대를 관통하는 흙수저 홍길동의 역적 이야기
MBC 월화드라마 "역적"은 홍길동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지만 본래 고전소설에 있던 내용과는 그 설정 자체가 다르다. 허균이 쓴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은 양반집에서 태어난 서자 출신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적서차별의 고통을 겪고 결국은 집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역적"에서 홍길동은 순수 노비인 아무개(김상중)의 아들이다. 그는 훗날 임금(김지석)과 마주하고는 자신을 이렇게 밝힌다. "나는 그저 내 아버지 아들이오. 씨종 아모개(김상중). 조선에서 가장 낮은 자."
※ PD저널 칼럼 - [정덕현의 드라마 드라마] '역적'의 도발, 양반 흉내 내기 싫은 홍길동
드라마는 이 조선에서 가장 낮은 자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아버지 아모개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홍길동이 애기장수의 힘을 갖고 태어났다는 걸 알게 된 아모개는 아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면천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외거노비가 되어 차근차근 돈을 모으지만 결국 그 돈이 사단이 되어 아내까지 죽음을 맞게 된다. 그리고 결국 아모개는 이런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 삶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주인을 향해 낫을 든다.
"우리 길현 어매, 길동이는 손가락 빨렸어도 도련님한테는 젖 물렸고, 우리 길현이는 도련님 대신해 숱하게 매 맞으면서 커들 않았서라. 내는 이날 이때까지 나리 모시느라고 허리 한 번 못 펴봤고,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이 집에 뼈며 살이며 힘줄까지 발라 바쳤는데... 아녀 아녀 나리 잘못이 아녀. 다 내 탓이여. 나리가 뭔 잘못이 있겄어. 온통 노비들은 인간이 아니라고들 하는데 나리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겄어... 어째서 그 때는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잉. 인간 같지 않은 것들 싹 다 죽여뿔고 새로 태어날 생각을 워째 못했을까잉."
▲ 이 대사 안에는 노비로 태어난 자가 대대로 그 힘겨운 삶을 대물림 받으며 살아야 하는 처지가 묻어난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우리네 금수저 흙수저로 대변되는 현재의 삶을 환기시킨다. 가난한 자는 계속 가난하게 살아야 하고 부자인 자는 더 부자가 되는 현실. ⓒMBC
이 대사 안에는 노비로 태어난 자가 대대로 그 힘겨운 삶을 대물림 받으며 살아야 하는 처지가 묻어난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우리네 금수저 흙수저로 대변되는 현재의 삶을 환기시킨다. 가난한 자는 계속 가난하게 살아야 하고 부자인 자는 더 부자가 되는 현실. 결국 주인을 죽인 아모개는 강상죄로 관아에 끌려가지만 주인 역시 폐비를 따른 강상죄가 있다는 그 증거를 들이댐으로써 무죄 방면된다.
그리고 시작된 새로운 삶. 아모개는 결국 면천하게 되고 익화리라는 곳에서 동네 사람들과 동무, 친구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꾼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이렇게 면천한 아모개가 길동과 길동의 형 길현에게 저마다 앞으로 했으면 하는 자신의 소망을 얘기하는 대목이다. 아모개는 길동에게는 장수가 되라고 하고 길현에게는 글공부를 좋아하니 과거시험을 준비하라고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길동과 길현은 둘 다 이 아버지의 소망을 거스른다. 길동은 장수보다는 박물장수가 되어 세상을 떠돌고, 길현은 배운 글공부로 아버지의 사업(?)을 돕는다. 과연 길동과 길현의 이런 선택은 그저 우연적인 것일까.
서자가 아닌 순수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홍길동 이야기를 재해석한 "역적"은 애초부터 저들 양반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길동을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듯 보인다. 즉 "홍길동전"에서 길동은 서자로 태어난 설움에 고통을 호소하고 그래서 탐관오리들을 처단하고 관아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의적이 되지만 동시에 그는 병조판서에 제수되기도 한다. 물론 "홍길동전"은 물론 당대로서는 혁명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지만 여전히 양반사회의 시스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역적"이 서자가 아닌 순수 노비 출신으로 홍길동을 설정한 것은 그래서 기존 잘못된 시스템에 편입되기보다는 독자적으로 스스로 개척하는 삶을 선택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것은 작금의 금수저 흙수저로 나뉘는 신계급사회가, 흙수저가 금수저를 지향하는 방향으로는 도저히 혁파될 수 없다는 걸 에둘러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역적"에서 양반 흉내 내기를 아예 치워버린 길동이라는 캐릭터는 그래서 대단히 도발적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