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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길고 긴 플랜미팅을 마치고 난 뒤에는 이렇듯 옥상에 올라 멀리 보이는 도심의 경관을 바라보며 길게 내쉬는 한숨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습니다. 커피를 한 잔 타서 마실까?' 생수를 담아간 종이컵의 바닥을 보이자 문득 가져본 생각입니다.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무실로 들어오면서 인스턴트 커피 한 잔을 만들어 들고 자리에 앉습니다. 화면보호기능에 꺼져있던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마우스를 신경질적으로 움직이면 금새 환해지는 것이 꼭 잘 토라지는 아내 얼굴을 닮은 것 같습니다.

이내 보이는 것은 미팅을 하러 가기 전에 작업을 하면서 열어 두었던 워드 문서와 PPT 자료. 작업 표시줄에 깜빡대며 빼곡히 얼굴을 내미는 것이 이미 내가 불러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미팅을 하면서 협의되었던 내용 중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들을 리스트 업(List-up)하고 나면 왠지 마음 깊숙한 곳에 본능처럼 숨어 있던 유혹이 속삭이듯 어떤 글이든 빨리 써달라고 재촉하는 것 같습니다. 끈적끈적하게 엉겨드는 이 달콤한 속삭임은 한 모금씩 목으로 넘기는 커피와 합쳐져 어느 순간 순식간에 대항하기 힘든 거대한 욕망으로 커져 버립니다.

나는 유혹에 약한 남자. 결국 업무와는 무관하게 새 글을 쓰기 위한 창을 열고는 누가 정해주지도 않은 주제를 만들고는 손가락을 움직여 타이핑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 바로 내 안에 또 다른 누군가의 생명이 숨어 있어 그 숨결이 조정하는 가장 강력한 힘에 스스로 항거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또 이해할 수 없는 내 행동은 '적당히 못 이기는 척하고 져주는 것도 괜찮은 거야.' 라고 스스로 속삭인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자기합리화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오늘은 '그래! 오늘은 내가 기분이 좋으니까 한번 져줄께'라는 혼잣말과 함께 이렇게 새문서의 창을 열어놓고는 주절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언제였을까요? 지난 몇 해 전 어느날, 근무하던 조직의 오너되시는 분께서 하루는 제게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이사. 이 이사는 지금... 뭐 나중에라도 괜찮고요. 여하튼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질문이 귀로 전달되자마자 전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곧바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냥 마대(?)자루에 그 동안 못 읽었던 책 가득 담아 조용한 곳으로 숨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한 6개월 정도만 아무 것도 안 하고 책만 읽다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운이 좋아 남들이 읽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한 책 한 권 쓸 수 있으면 더 좋겠고 말입니다."

그때로부터 몇 해가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에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냥 가슴 속에만 담아두고 있을 뿐이지요. 언젠가 그럴  기회가 반드시 올 거라 믿고 오늘 업무를 서둘러 마무리 합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