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진보 쓰레기 '노동자연대'의 민낯을 보라
5월 23일자 노동자연대(209호) <문재인 정부의 개혁 ‘선물’을 기다리지 말자>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최근 문재인 지지자들이 노동운동과 그와 연계된 좌파들에게 신경질적 공격을 퍼붓는 것은 이런 문재인 개혁의 (본질적) 성격 문제가 배경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중의 합격점에 도달하도록 노력하기보다는 합격선을 낮춰 버리겠다는 것이다. 문재인 개혁을 대하는 태도는 개혁의 양적 차이나 시간에 대한 인내심 문제가 아니라, 목표와 지향의 차이 문제다. 그리고 계급 문제인 것이다.
참으로 허무맹랑한 논리이자, 입진보 쓰레기의 전형을 보여주는 극악무도한 편가르기에 다름 아닙니다. 이어 5월 26일에는 <학살자 전두환 찬양한 어용기자 - 문재인은 이낙연 총리 지명 철회하라>라는 제목의 성명까지 냈습니다.
노동자연대는 이번 성명을 통해 "최악은 이낙연이 〈동아일보〉 기자 시절 전두환의 ‘업적’을 찬양하는 기사들을 쓴 것"이라며 "1981년 이낙연은 기사에서 전두환과 미 대통령 레이건의 한미정상회담, 전두환의 아세안 방문 등에 극찬을 보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당시 미국 정부는 전두환의 1980년 5월 광주 학살 진압 계획을 알고도 '안정이 우선'이라며 묵인했다. 뿐만 아니라, 쿠데타 후 가장 먼저 전두환 정부를 인정해 행여라도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위험을 막아줬다. 그래서 전두환은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가서 만난 것이다. 전두환은 레이건이 취임 후 첫 만난 외국 정상이 자기라며 홍보했"다고 언급한 뒤 "이낙연 본인은 이런 과거 기사들에 “부끄럽다”면서도 기자 초년 시절이고 “위대한 영도자”라는 표현은 인용 보도일 뿐이라며 변명하기 급급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이와 관련 '미디어오늘'은 이미 지난 5월 24일자 기사 <이낙연 ‘전두환 찬양’ 기사,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 발언이었다>에서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가 1980년대 동아일보 기자 시절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씨에 대해 ‘위대한 영도자’라고 표현하는 등 찬양 기사를 썼다는 지적이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나왔"음을 지적하며 "실제 이 후보자가 쓴 기사를 확인한 결과 해당 표현은 이 후보의 논평이 아닌 당시 권익현 민정당 사무총장이 한 말을 기사로 옮긴 것"이었을 뿐이라고 전했습니다.
또한 "24일 국회에서 열린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 동의에 관한 인사청문회에서 김광수 국민의당 의원은 '이 후보자가 동아일보 정치부 기사로서 글 쓴 칼럼을 보니 한미정상회담에 대해 놀랍다, 잘됐다라는 반응을 얻을 만하다고 평가했다'며 '인용한 것이긴 하지만 위대한 영도자라는 표현도 자주 나온다'고 지적했"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하지만 이 후보자가 쓴 기사 중 ‘위대한 영도자’라는 표현이 나오는 기사는 1983년 1월26일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이 지방은 민정의 뿌리… 경남 출신 의원들 전 대통령 선영 참배> 기사 하나뿐이었"음을 강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기사는 1983년 1월25일 경남 합천에서 열린 민정당 의령·함안·합천 지구당 개편대회 격려사를 한 권익현 사무총장이 '이 나라의 위대한 영도자이신 우리당 총재(전두환) 출생지인 이곳에서 평생 동지들이 모여 정기위원회(개편대회)를 갖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발언한 것을 옮긴 것"이었음을 확실히 밝혔습니다.
결국 "이 기사는 당시 집권여당 행사를 취재한 이 후보자가 주요 당직자의 발언을 기사로 전달한 동정 보도로, 기자의 주관적인 논평이 아니"며, "이를 테면 현재 야당 사무총장이 전두환을 찬양하는 발언을 한 것을 언론사 기자가 옮긴 것과 같은 보도행위"였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아래는 이낙연 후보자가 인사청문회장에서 발언했던 것들을 옮긴 것입니다.
- 한미 정상회담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였고, 당시 언론인들의 여러 행적에 대해서 언론을 비판하고 분석하는 여러 매체가 있지만 내가 그 비판의 대상이 된 적은 없었다. 내가 만약 아주 몹쓸 짓을 한 기자였다면 김대중 대통령이 나를 발탁하지 않았을 것
- 해직돼서 큰 고통을 겪은 선배들께 늘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 당시에 나는 견습을 막 끝내 언론자유 운동에 끼워주지도 못할 정도로 어린 기자였다. 내가 견습을 마치고 약 보름 뒤에 10·26 사태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