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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항쟁은 전두환 정권 기간 내내 억눌려있던 민주화의 열망이 폭발한 시위였다. 이게 기폭제가 돼서 6‧10 민주항쟁이라는 대규모 시위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 동안의 프로그램들은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으로부터 6‧10 민주항쟁이 촉발돼 대규모 시민 항쟁으로 번지고 결국 전두환 씨가 항복했다는 이야기 구조에 머물고 있다. 이런 관성을 깨고 싶었다. <6월 민주항쟁 30주년 특별기획-그 날, 1986년 5월 3일> 연출, 박철현 OBS PD 인터뷰 중


→ PD저널 기사 : OBS 존재가치 증명할 다큐 온다...5.3 인천민주항쟁 '그날'


방송 역사상 최초로 ‘5‧3 인천민주항쟁’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가 방송된다. OBS 경인TV의 <6월 민주항쟁 30주년 특별기획-그 날, 1986년 5월 3일>(<그 날>)이다.


지난 26일 부천시 오정구 오정동 OBS 사옥 인근에서 <PD저널>과 만난 박철현 OBS PD는 “오는 7월 1일, 1986년 5월 3일, 인천에서 있었던 대규모 시위인 5‧3 인천민주항쟁(이하 5‧3 항쟁)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OBS에서 방송된다”며 “전두환 정권 타도와 민주정부 출현을 외쳤던 그 날의 시위가 87년 6월 항쟁에 미친 영향을 조명해 보고, 그 속에 숨어있는 시민정신을 새롭게 조명하는 동시에 민주화 과정에서 인천의 역할을 평가해 보려고 한다”고 밝혔다.


▲ 오는 7월 1일 방송예정인 OBS 다큐멘터리 '그 날'. 1986년 5·3 인천민주항쟁을 방송 최초로 다뤘다.ⓒ언론노조 OBS 희망조합지부


1986년 5월 3일, 인천 남구 주안사거리 일대에서는 1980년 5월 18일에 일어난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발생했다. 바로 5.3 항쟁이다. 1980년 이후 전두환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져가고 전국 각지에서 시민단체들이 조직되던 그 때, 1984년 인천에서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이하 인사연), 인천지역노동자복지협의회(이하 인노협) 등을 중심으로 노동자 권익 향상과 직선제 개헌 등에 대한 요구가 분출되고 있었다.


1986년 봄, 인사연을 필두로 한 학생, 노동자 등 인천의 민주화 투쟁 주체들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하 민통련)은 인천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당시 제1야당 신민당의 개헌추진지부 현판식 대회에서 전두환 정권과 재벌 타도, 노동자 인권 보장 등을 외쳤다.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이들은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였지만,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인해 과격시위로 변했고, 전두환 정권이 인천 5‧3시위를 좌경용공세력에 의한 체제 전복기도로 규정했다’고 주장한다. 또 5‧3 항쟁을 기점으로 전두환 정부가 전국적인 민주화 열기와 투쟁에 탄압으로 일관하기 시작했으며, 부천경찰서 성 고문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이어져 1987년 6월 항쟁의 불씨가 됐다고도 말한다.


항쟁 참여자를 포함한 민주화운동가들과 일부 인천시민은 5‧3 항쟁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1980)이나 부마항쟁(1979)만큼이나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의 맥을 잇는 중요한 사건이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나 부마항쟁이 광주나 부산‧마산 지역에서 그러하듯 5‧3 항쟁도 인천의 지역정신을 대변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중요성만큼 5‧3 항쟁은 조명을 못 받고 있다. 5‧3 항쟁을 주제로 한 방송이 만들어진 적도 없다.


박 PD는 바로 이런 아쉬움에서 기획을 시작했다. 그는 “<그 날>은 5‧3 항쟁이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 속에서 어떤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지 조명하는 프로그램”이라며 “올해 6월항쟁 30주년을 맞아 각 방송사에서 여러 (특집)프로그램들이 나왔는데, 5‧3 항쟁을 다룬 프로그램은 없었다. 민주화라는 것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한 게 아니고, 전두환 씨가 갑자기 직선제를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5‧3 항쟁은 전두환 정권 기간 내내 억눌려있던 민주화의 열망이 폭발한 시위였다. 이게 기폭제가 돼서 6‧10 민주항쟁이라는 대규모 시위도 가능했던 건데, 그 동안의 프로그램들은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으로부터 (시위가) 촉발돼서 대규모 시민 항쟁으로 번지고 결국 전두환 씨가 항복했다는 이야기 구조에 머물고 있다. 이런 관성을 깨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어 “1986년, 전두환 씨는 임기가 다 끝나가던 시기라 (민주화 운동 세력을 보고) ‘얘들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래서 민주화 운동을 심하게 탄압했다. 그 과정 속에서 부천경찰서 성 고문 사건도 일어났고, 5‧3 항쟁으로 수배된 사람들을 색출한다면서 무리하게 고문하다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도 일어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5‧3 항쟁은 6월 항쟁의 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며 이런 이야기들을 <그 날>에 최대한 충실하게 담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박 PD는 <그 날>을 기획‧제작한 약 2개월 동안 10여 명을 훌쩍 넘는 사람들을 만났다. 당시 시위 현장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크게 민통련, 학생운동권, 노동자그룹 등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 그룹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기꺼이 <그 날>의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뿐만 아니라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에 몸담았던 노회찬 정의당 의원 부부도 <그 날>에 출연해 5‧3 항쟁에 관해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와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등 학계 인사들도 5‧3 항쟁의 의의를 학술적인 측면에서 뒷받침하기 위해 <그 날>에 목소리를 보탰다.


박 PD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는 엄혹했던 시절이라 (5‧3 항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구속 심지어 죽음을 각오하고 현장에 나갔는데, 그런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며 “아무리 그 당시에 민주화 운동을 치열하게 했던 분들이라도, 죽음을 불사하고 현장에 나갔다는 건 그만큼 ‘전두환 정권을 내 목숨을 바꿔서라도 무너뜨리고 민주정권을 세우겠다’는 그 분들의 신념이 강했다는 것이다. 존경스러웠다”고 말했다.


사실 박 PD가 제작 과정에서 만난 건 이들뿐만이 아니다. 홍미영 인천 부평구청장과 박우섭 남구청장 등 지방자치단체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천민주화운동센터 등 시민단체를 만나 <그 날>에 대한 관심과 재정적 지원을 요청했다.


통상 방송 프로그램은 외주 제작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방송사 내부에서 제작비를 지원받아 제작된다. 그러나 <그 날>은 OBS 사측으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지 못했다. 결국 박 PD가 직접 발품을 팔며 지자체나 민주화운동 관계자들에게 펀딩(자금 지원)을 받았고, 우여곡절 끝에 <그 날>이 제작될 수 있었다.


박 PD는 처음 기획 단계부터 실제 제작이 이루어지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고 털어놨다.


그는 “나는 사실 인천 토박이가 아니라서 5‧3 항쟁을 잘 모르고 있었는데, iTV(OBS의 전신)이 정파되고 OBS가 개국하기 전인 2006년 공익적 민영방송 투쟁을 하고 있을 때, 5‧3 항쟁 20주년 기념행사를 가서 처음 알게 됐다. 그 때 개인적으로 다짐했다. 새 방송국이 생기면 꼭 이 아이템을 프로그램화해야겠다고. 그 때 만났던 분들에게도 약속 아닌 약속을 했다”며 “그러나 구체적으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게 된 건 5‧3 항쟁 30주년이었던 지난 해였다. 편성제작국에 기획안을 냈는데, 편성국장이 ‘예산이나 당시 사회적 분위기, (박근혜) 정권 성향 등을 생각했을 때 힘들 것 같다. 미안하다’고 해 (제작이) 좌절됐다. 그 당시 언론판 분위기 등을 종합적으로 생각해서 국장이 결정을 내린 것 같다. 회사에 얘기를 해 보고 그렇게 한 건 아닌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OBS 노조인 희망조합지부에 따르면, 회사는 오래 전부터 축소경영 기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경영난을 이유로 일종의 ‘다운사이징(Downsizing)’을 하고 있다는 건데, 이 가운데서 가장 눈에 띄게 축소되고 있는 부분이 제작 부문이다. 제작 인력을 줄이고, 자체제작 프로그램을 줄이는 것이다. 현재 OBS의 자체제작 프로그램은 보도제작물과 옴부즈맨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명불허전>과 <전기현의 씨네뮤직>, 2개가 전부다. 당연히 <그 날>에 대해선 제작지원은 물론 편성조차 미지수였다.


박 PD는 “밖에서라도 예산을 지원받아서 해 보자는 마음으로 몇 군데 접촉했는데, 처음엔 추진이 잘 안 됐다. 그래서 결국 지난해에 제작이 좌절됐다”며 “하지만 올해 들어서 다시 ‘꼭 프로그램을 제작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2017년은 1987년 6‧10 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이에 앞서 2016년에는 헌정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파면을 가능하게 한 이른바 ‘촛불혁명’이 있었기도 했다. 박 PD는 이런 시대적 흐름을 보고 ‘다시 한 번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밝혔다.


박 PD는 “지난 연말부터 이어져 온 ‘촛불 시민혁명’으로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새로운 민주정부가 수립된 이런 시기에 민주주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 참 좋은 시기라고 생각했다. 올해가 아니면 프로그램을 하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며 “10년 전 약속 아닌 약속을 했던 분들을 찾아갔다. 과거에 (OBS) 새방송창사준비위원회 때 많은 도움을 주셨던 인천민주화운동센터 등 인천에서 시민단체 활동을 꾸준히 하신 분들이 계신다. 작년에 5‧3 항쟁 30주년 사업도 하셨던 분들이라 ‘올해 예산이 힘들어서 프로그램을 못 만들 것 같다’고 솔직히 고충을 말씀드렸더니, 도와주셨다. 감사하다”고 전했다.


그래서일까, 박 PD는 <그 날>에 대해 “OBS 방송 정상화 투쟁을 응원하고 지지해주시는 분들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 오는 7월 1일 방송예정인 OBS 다큐멘터리 '그 날'. 1986년 5·3 인천민주항쟁을 방송 최초로 다뤘다. ⓒ언론노조 OBS 희망조합지부


“다큐 <그 날>, OBS의 새로운 시작되길”


가까스로 지원을 받아 제작이 시작됐지만, 제작 현장은 열악했다. <그 날>의 제작진은 연출을 맡은 박 PD를 비롯해 촬영감독과 메인작가, 3명이 전부다. 인력이 부족해 촬영감독이 오디오 업무까지 겸임해야 했고, 조연출이 없어 메인 연출자인 박 PD가 예고편 등의 편집까지 도맡아서 해야 했다. 메인작가는 보조작가도 없이 일했다. 이에 대해 박 PD는 “한시적으로 만드는 특집 다큐멘터리이다보니, 인력을 구하기가 더욱 힘들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지만, 박 PD는 <그 날>을 통해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고 했다.


박 PD는 “(<그 날>을 통해) OBS의 역할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운을 뗐다. 그는 “우리가 OBS 방송정상화 투쟁을 하고 있지만 ‘뭐 때문에 OBS가 정상화돼야 하느냐’고 하면 ‘이런 프로그램(<그 날>)을 (방송사) 자체예산을 가지고 많이 만들 수 있어야 하고, 그걸 만들 방송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라며 “프로그램을 통해 OBS가 누굴 위해 존재하고, 왜 존재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공감을 얻고 싶다. (보는 사람들이) 작게나마 공감을 해 준다면, 우리가 하는 방송정상화 투쟁에 큰 힘이 될 것 같다. ‘우리가 옳은 길을 가고 있구나, 옳은 걸 주장하고 있구나’하는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박 PD는 <그 날>이 OBS의 새로운 시작이 되길 바란다는 바람도 전했다. 그는 “기자의 기사가 역사 기록이고 사료이듯, 방송 프로그램도 다 역사 기록이다. 그런데 OBS가 없어지고 나면 (지역의 일을) 누가 기록하겠느냐”며 “(방송을 계기로) OBS 구성원들을 비롯해 정책 당국, 정치권, 지역사회 등 책임있는 주체들이 머리를 맞대서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고 투쟁도 힘을 얻어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1986년 일어난 5·3 인천민주항쟁을 방송 역사상 최초로 다룬 다큐멘터리 <그 날>은 오는 7월 1일 OBS에서 볼 수 있다. 본방송은 이 날 오후 8시 10분이며, 재방송은 7월 3일 오전 0시 50분이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