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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


1)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이명박은 92년 민자당(민정, 통일민주, 공화당이 3당 합당한 정당) 공천을 받고 전국구(지금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하게 됩니다.


2) 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종로에 출마한 이명박은 당시 거물급 정치인인 국민회의 이종찬, 그리고 야당 통합운동을 하던 노무현과 겨뤄 당선되어 재선의원이 됩니다.


3) 하지만 선거기간 선거비용 과다 지출로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되고, 이것을 감추고자 보좌관을 해외 도피시키는 등의 악행을 저지릅니다. 결국 1심 법원에서 벌금 700만 원을 선고 받고 국회의원직을 박탈 당할 상황에 몰리자 스스로 국회의원을 사퇴합니다. 


4) 97년 국회의원에서 사퇴하고 98년 서울시장 후보가 되고자 경선에 출마했으나 2심에서도 당선무효형이 나오자 경선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도피합니다. 최종심 결과 선거법 위반 형은 확정되고 피선거권 제한에 걸리게 됩니다.



5) 명목상은 유학이지만 미국(LA)으로 도피성 외유를 떠난 이명박은 그곳에서 평소 자신을 지지해 왔다고 하는 젊은 여성 변호사와 친하게 지내게 되는데 이 여자가 바로 에리카 김입니다.


6) 두 사람은 94년, 미국교회의 신앙간증회에 처음 만납니다. 당시 에리카 김은 미국 이민교포 2세로 30세의 성공한 여변호사, 이명박은 대기업 CEO를 지낸 53세의 초선 국회의원입니다.


7) 이렇게 만났던 두 사람은 3년 뒤인 97년 다시 미국에서 재회합니다. 둘 다 유부남 유부녀에 스무살이 넘게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 무슨 일을 별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에리카 김은 이명박에게 잘나가는 남동생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8) 에리카 김의 동생인 김경준은 코넬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와튼스쿨에서 MBA를 마친 교포 사회의 수재였습니다. 모건스탠리와 살로먼스미스바니 증권회사에서 엄청난 연봉을 받으며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9) 에리카 김이 이명박에게 동생을 소개시켜준 것은 이명박이 자신의 정치적 업적을 만들기 위해 금융산업의 성공이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이명박은 다시 정치권에 복귀하려면 과거 현대건설과 같은 성공 업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인터넷 금융업으로 생각했습니다.).


10) 이명박을 도와서 그 업적을 만들 수 있는 인물로 자신의 동생인 김경준이 딱이라는 생각에 에리카 김은 김경준을 이명박에게 소개시켜준 것입니다.


11) 누나의 소개로 이명박을 만난 김경준은 그의 뜻대로 우선 투자자문회사인 BBK를 만들게 됩니다.



김경준은 누구인가


1) 이명박이 만난 에리카 김, 그리고 그 동생 김경준(크리스토퍼 김)은 미국 사회에서 나름 성공한 이민자 2세로 손꼽힙니다.


2) 김경준은 5살 때(71년) 가족과 함께 LA로 이민을 갑니다. 어려서부터 전교 1등을 도맡아 할 만큼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다고 김경준은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3) 누나인 에리카 김 역시 공부 잘하는 뛰어난 엘리트 학생이었는데, 그녀는 LA에 있는 한국 교포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강해 관련된 활동도 많이 맡아 했다고 합니다.



4) 하지만 김경준은 그런 누나와는 달랐습니다. 그는 한국 사회가 미국 사회 전체와 동떨어져 폐쇄적으로 운영되는게 불만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한인교포가 아닌 진짜 미국인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습니다.


5) 그는 야망이 컸습니다(이런 성격 때문에 MB와 꿍짝이 잘 맞았을 것). 그는 한국뿐 아니라 모든 아시안 아메리칸들을 대표하고 싶었습니다. 미국인들은 코리아, 차이나, 재팬 잘 구별도 못하는데 우리끼리 한인사회니 뭐니 하는게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었습니다.


6) 공부를 잘했던 김경준은 하버드를 지원했지만 낙방하고 대신 아이비리그 다른 명문 대학은 다 붙습니다. 결국 그는 누나가 다니던 코넬대학에 갑니다. 그는 하버드 못 간 것은 아쉽지만 코넬도 명문 대학이라서 꿀릴 게 없었다고 했습니다.


7) 김경준은 코넬대학에서 한인학생회장이 아닌 전체 학생회장을 했다는것에 자부심을 갖습니다. 그는 학교 내 한국 학생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미국 학생들과 더 친했습니다. 그만큼 그는 야망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8) 김경준은 코넬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합니다. 일단 공부로 성공하자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경제학이 유명한 시카고대학에 가서 석사학위도 땁니다.


9) 시카고대학 경제학 석사를 마치고 GE 캐피탈에서 일했습니다. 당시 GE의 CEO는 유명한 잭 웰치였습니다. 김경준은 GE에서 기업 인수합병과 관련해 많은 결과를 만들었다고 자화자찬 했습니다.


10) 그 뒤 김경준은 미국에서 최고라고 평가받는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의 MBA과정(와튼스쿨)에 입학합니다. - 트럼프 대통령과 그 동창(?) 안철수가 나온 학교


11) 김경준은 와튼스쿨을 졸업하고는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에 갑니다. 모건스탠리는 주류 백인중심의 회사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회사에 아시아계 이민2세가 취직을 한 거니 그걸로 보면 김경준은 백인 주류사회에 성공적으로 입성하게 된 것입니다.


12) 김경준은 모건스탠리에서도 승승장구합니다. 고객 돈이 아닌 회사 자체 자산을 운영하는 팀에 들어갑니다. 이건 회사의 핵심 역량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최고연봉을 받았고 회사의 기대도 높았습니다.


13) 당시 미국 투자은행들은 아시아 신흥지장을 주목했습니다. 회사의 기대를 받던 김경준은 이 여세를 몰아 모건스탠리 일본담당자로 갑니다.


14) 일본에서 아시아 시장을 경험한 김경준은 일본보다 한국이 더 매력적인 투자금융시장이 될 것으로 판단해 한국으로 입성합니다. 한국말도 잘 못했지만 어쨌건 한국계이기는 하니까 자신이 가면 큰 역할을 하겠구나 생각했던 것입니다.


15) 김경준은 살로몬 스미스 바니의 한국 지점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때가 1997년, 한국에 막 투자은행이라는 개념이 도입될 때였습니다. 그의 나이 만 31세의 일입니다.


16) 97년 한국에 IMF가 터지고 한국은 구제금융 받으면서 금융시장을 개방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를 틈타 미국 교포출신 투자은행 사람들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검은머리 외국인들, 김경준은 그들 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7) 당시 한국엔 투자은행업, 파생상품,, 글로벌 금융시장에 대해서 뭘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김경준은 완전 최고전문가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환경은 그를 연봉 20억의 초고액연봉자로 만들었습니다.


18) 그러던 어느날 김경준은 김백준이라는 사람의 전화를 받습니다. 그는 자신을 전 현대종금 대표라고 소개했습니다. 김경준은 그사람이 누군지 몰랐는데 그사람 부탁은 자신이 아닌  ‘자신이 모시는 대단하신 분 한 분을 만나달라’는 거였습니다.


19) 도대체 대단한 사람이라는게 누구지? 궁금한 마음에 서초동 영포빌딩을 찾아간 김경준이 만난 사람이 바로 이명박입니다.


20) 아침 7시20분 미팅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이명박은 늘쌍 이랬습니다. 자신이 열심히 일한다는 티를 냈습니다. 김경준은 이런 이명박에게 짜증이 났습니다. 이명박의 첫인상도 좋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욕망이라는 목표속에 움직이는 이명박과 김경준은 그런 면에서 죽이 잘 맞았습니다.


21) 당시 이명박은 국회의원 하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박탈당하고 사업할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금융업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당시 금융시장 개방하고 막 발전하기 시작할 때니까 타이밍은 잘 잡은 거 같았습니다.


22) 김경준과 이명박은 금융감독원을 지독히 싫어한다는 점에서도 죽이 잘 맞았습니다. 이명박은 예전부터 공무원들을 무지 싫어했는데 김경준 역시 한국의 금감원 사람들을 대놓고 깔봤기 때문에 둘이 힘을 합치면 금감원을 속이고 대박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23) 이명박과 김경준의 계획은 종합금융그룹을 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한국의 법률안에선 이게 불가능합니다. 한국은 증권사, 투자자문사, 보험사를 다 따로 승인받고 운영도 따로 해야 했습니다.


24) 이명박과 김경준은 이런 회사들을 독립적으로 하나씩 설립하는 척해서 금감원에 각각 허가를 받은 다음, 나중에 주식을 다 합쳐 실질적으로 하나의 회사가 되도록 뭉치자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25) 김경준이 생각하기에 이건 불법이었지만 이명박은 그런 일에 자신은 경험이 많다고 하면서 김경준을 설득했습니다.


26) 김경준은 뭐가 되었던 종합금융회사만 생기면 그때부터 자신의 파생상품 운영 능력으로 돈을 굴려서 떼돈을 벌 자신이 있었습니다.



27) 여기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김경준이 이명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준 : 명박 님, 회사를 세우려면(투자자문 설립요건) 자본금 30억 원이 필요합니다.

명박 : 왜 그돈이 다 필요해?

경준 : 규정이니까요.

명박 : 이 순진한 놈, 내가 가르쳐줄께.


일단 1억을 입금 해. 그리고 바로 출금을 해. 그리고 다시 입금 해. 다시 출금 해. 이걸 30번 반복하는 거야. 다 합치면 입금이 30억, 출금이 30억 찍히잖아. 그리고 나서 은행 지점장한테 부탁을 하란 말야. 일단 입금 전표들만 빨리 처리하고, 출금 전표들은 나중에 따로 몰아서 처리하라고 하란 말야. 그리고 일단 입금된 내용들만 가지고 금감원 가서 신고하라고.


경준 : (이런 개늠) 와 대단하다.


※ 자료출처 : BBK의 배신(김경준),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미디어오늘



도곡동 땅, 모든 것의 시작


1) 92년 대선을 통해 김영삼 정부가 탄생합니다.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80년 신군부의 탄압 때까지 줄곳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지만 90년 3당야합이라는 치명적 선택 때문에 정권의 정통성 시비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2) 정통성 콤플렉스가 있던 김영삼 정부가 꺼내든 조치는 이른바 3대 개혁안입니다. 우선 군부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여 정치군인을 숙청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해 지하자금을 퇴출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꺼내든 게 바로 공직자 재산공개에 관한 법입니다.


3) 공직자재산공개법이 만들어지자 청와대, 내각, 국회의원들의 재산이 공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부터 먼저 재산을 공개하니 나머지 공직자들이 반대를 할 명분이 없어졌습니다. 재산공개 파문으로 당시 의전서열 3위 김재순 국회의장이 정계은퇴를 선언할 정도로 후폭풍이 컸습니다.


4) 여야 가릴 것 없이 재산공개 파문 속에 휘청거렸습니다.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은 이런 정국상황을 주도하고자 당내에 재산공개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여당 의원부터 공개한 재산이 맞는지 확인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5) 재산공개 여파가 한창이던 93년 3월27일 세계일보는 다음과 같은 특종을 터트립니다.



<이명박 의원은 150억대 땅 은닉 / 도곡동 "금싸라기 땅"… 현대사장 때 매입>


"국회의원 재산공개에서 총재산 62억3240만 원이라고 신고한 민자당 이명박 의원이 85년 현대건설사장 재직 때 구입한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시가 150억 원 상당의 땅을 처남 명의로 은닉한 사실이 26일 밝혀져 이번 재산공개에서 고의로 누락시켰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이 의원은 현대건설사장에 취임한 77년부터 서울 강남 개발붐이 시작되자 회사 차원의 부동산 투자를 해오다 85년부터 강남구 도곡동 165일대 현대체육관 인근 나대지 1313평을 개인적으로 구입, 부인 김윤옥 씨(46)의 동생 재정 씨(44·우방토건대표) 명의로 등기해 놓은 것으로 밝혀졌다"


6) 정리하자면 당시 초선의원이던 이명박이 공직자 재산공개법에 따라 재산을 공개했는데 도곡동 땅을 처남 김재정 명의로 숨겨놓고 재산공개 때 공개하지 않다가 당 진상조사특위에 걸렸다는 내용입니다.


7) 이것은 당시 김영삼 정부 청와대와 민자당 재산공개진상파악특위(위원장 권해옥)의 내사결과 확인된 사실입니다. 93년은 부동산 실명제법이 도입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차명으로 부동산을 관리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언론들도 등기 절차상의 문제보다는 재산공개시 누락 부분에 초점을 맞춰 보도를 했습니다.


8) 93년 9월이 되자 민자당은 임기초 개혁 드라이브는 이 정도면 되었다고 판단해서인지 재산공개 파문을 더 이상 확산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명박은 애초 60억 원대로 공개한 재산에 서초동 땅(지금 청계재단이 있는 영포빌딩 땅)을 포함해 250억으로 재산공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징계를 피했습니다(차명으로 가지고 있던 도곡동 땅은 수면 아래로 내려감).


9) 그러다가 95년 3월, 당시 15대 국회에서 부동산실명제법이 만들어집니다. 해당법이 7월 공포가 되자 차명으로 가지고 있던 부동산은 정가의 화두가 되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재산공개를 누락하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린 것입니다.



10) 결국 그 도곡동 땅은 95년 9월 포스코개발에 팔립니다. 이때 도곡동 땅의 매매가격은 263억 원. 무려 247억원의 시세차익을 남긴 셈입니다.


11) 도곡동 땅을 포스코 개발에 팔 때 등기상 땅의 소유주는 이상은(이명박의 친형, 다스대표)과 김재정(이명박의 처남, 김윤옥의 동생)이었습니다. 따라서 매각 대금 역시 두 사람에게 전달되었습니다.


12) 다시 정리하면 도곡동 땅은 95년 6월 포스코건설에 263억 원에 팔립니다. 매각대금 가운데 양도소득세등을 지출하고 남은 돈 약 200억 원은 95년 12월 만기5년 조건으로 3개 생명보험회사에 나눠져 맡겨집니다.


13) 만기가 된 2000년 12월 29일, 김재정 명의 40억 원의 보험환급금 62억8,800만 원과 이상은 명의 60억 원의 원리금 94억6천만 원 등 157억4,800만 원이 이상은 명의 계좌로 이체됩니다.


14) 이 돈은 계좌에서 빠져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1년 뒤 2001년 6월에 이상은 앞으로 다시 147억 원이 입금됩니다. 이 사실은 07년 7월 당시 한나라당 후보 검증청문회에서 한 검증위원이 해당 계좌에서 본 내용이라면서 공개한 내용입니다.


15) 다스는 2000년 12월 28일과 30일, 외환은행 경주지점에서 하나은행 삼성센터지점으로 BBK 투자금 90억 원을 나누어 송금합니다. 도곡동 땅 매각대금 가운데 157억여 원이 이상은 계좌에서 빠져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시점이 바로 12월 29일입니다.


16) 다스는 2000년 10월 10일, 53억 원의 어음을 할인해서 그날로 50억 원을 BBK에 송금하는 등 당시 자금사정이 빠듯한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스의 주택은행 주거래 계좌를 보면, 2000년 4월 25일 이전까지 잔액이 몇십만 원에 불과할 정도였습니다.


17) 그럼에도 다스가 190억 원이라는 거금을 BBK에 투자하게 된 경위는 이 사건 실체를 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다스 자체의 자금으로는 190억 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BBK에 보낼 수 없다. 그렇다면 그돈은 바로 도곡동 땅 매각 대금?


18) 07년 8월, 검찰은 이명박의 부동산 투기 의혹과 관련된 중간 수사발표를 합니다. 이날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이명박 후보의 도곡동 땅과 관련해 매입 및 매각 대금을 등기상 주인인 친형 이상은이 직접 관리하지 않고 제3자가 관리한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힙니다.


19) 검찰은 이명박의 친형 이상은과 처남 김재정이 도곡동 땅을 자신들의 소유라고 주장하면서 매입자금 출처에 대해 골재채취 및 현대건설 납품이익, 젖소 판매대금, 일본 식품회사의 사우디아라비아 수출중개 수수료 등으로 7억8천만 원을 조달했다고 해명했으나 객관적 증빙 자료가 전혀 없고 자료 제출조차 거부하고 있다고 밝힙니다.


20) 또한 매각 대금 중 김재정의 몫은 본인 소유인 것은 확실하나 친형 이상은의 경우 이상은이 개인적으로 사용한 것이 전혀 없고 100억 원이 넘는 거액의 돈을 금리가 낮은 채권 등 간접투자상품에 10년 이상 넣어둔 것을 보면 제3자의 돈인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21) 특히 02년 7월부터 07년 7월까지 매달 2천만~4천만 원씩 15억여 원을 97차례에 걸쳐 전액 현금으로 인출하는 등 매우 이례적 거래 양태를 보였다고 밝힙니다. 이상은은 이에 대해 본인과 아들의 생활비 등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했지만 15건이 해외 출국 때 인출됐고 자금관리인과 통화한 일이 없는 점 등을 감안하면 이상은 본인의 돈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22) 검찰은 이번 수사 발표를 통해 서울 도곡동 땅 매각대금 사용처를 추적한 결과, 1995년 8월 이상은의 매각 대금 중 7억9,200만 원이 다스의 유상증자 대금으로 납입되고, 2000년 12월에 10억 원은 이상은이 다스에서 빼내어 쓴 돈을 갚는 ‘변제’ 형식으로 들어온 사실을 확인합니다.


23) 하지만 그렇다고 다스의 실질적 소유자가 이명박이냐 사건의 핵심에 대해서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혐의처분을 내립니다. 수사를 담당한 특수1부 김홍일 3차장검사는 “다스가 ‘이 후보의 소유가 아닌 거 같다’가 아니라 다스가 ‘이 후보의 소유라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또한 최재경 특수1부장도 “의심스럽지 않다는 게 아니고 증거가 안 나온다. 그래서 그 소유주가 이명박 씨라고 볼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며 “할 수 있는 수사는 다 했다는 판단 아래 무혐의 처분했다”고 덧붙입니다.


24) 다스가 누구 소유인가를 떠나 다스라는 회사가 정말 190억을 투자할 여력 있었나는 의문에 검찰은 말끔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시된 다스의 회계자료를 보면, 1999년 말에 다스의 이익잉여금(당기순이익이 쌓인 돈)은 85억 원이었습니다.


25) 다스가 BBK에 190억 원을 투자한다는 계약을 맺은 건 2000년 3월입니다. 그해 연말까지 몇십억 단위로 BBK로 투자금이 건너가기 때문에, 2000년 말까지 적어도 105억 원이 다스로 들어와야 합니다. 1987년 창사 이래 모은 85억 원보다 더 많은 돈을 1년안에 벌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26) 검찰은 당시 다스가 가지고 있는 200억 원을 ‘이익잉여금과 납품대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입니다. 세상에 어떤 회사도 납품업체에 납품대금으로 주려고 잠시 가지고 있는 돈을 함부로 위험한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27) 결국(당시 검찰은 끝내 밝히지 못했지만) 다스 안으로 어떤 형태로든 돈이 들어와서 그것이 다스의 BBK 투자금이 되었다는 추론은 가능성이 상당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다스로 들어간 가장 가능성 높은 돈은 도곡동 땅 값이 아닐지 의심.


※ 요약


도곡동 땅 → 매각 → 다스 → 투자 → BBK, 이렇게 자금이 흘러갔다는 것입니다.

도곡동 땅부터 다스, 그리고 BBK의 실질적 소유주는 아마도 이명박이 아닐까 라는 의심.


※ 자료출처 : 한겨레신문, 위키피디아, 세계일보, 그 밖에 개별취재



위 본문은 문재인 정부의 어용매체를 지향하는 뉴비씨(NewBC) 뉴스(NewBC 광화문시대) 경영책임자 김형석 대표가 시민기자 게시판에 총 3편으로 연재한 글입니다만, 본 블로그에서는 편의상 하나의 글로 합쳤습니다. 아울러, 본문의 호칭은 임의로 바꿨으며 경어체를 사용했습니다. 원문 내용은 아래와 같이 링크를 첨부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명박과 BBK사건 (1편) : http://newbc.kr/bbs/board.php?bo_table=comm1&wr_id=7048


▶ 이명박과 BBK사건 (2편) : http://newbc.kr/bbs/board.php?bo_table=comm1&wr_id=7101


▶ 이명박과 BBK사건 (3편) : http://newbc.kr/bbs/board.php?bo_table=comm1&wr_id=7121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