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등돌린 독자에 대한 한국기자협회 기획기사 - 글쎄, 그럴까?
1월 2일 늦은 오후 한국기자협회는 [저널리즘은 신뢰다]라는 명제의 기획기사 1탄, <독자 따라가지 못하는 언론 - "독자 누군지도 모르고…그 사이 독자는 언론에 등 돌렸다">를 보도했습니다.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독자 외면한채 나홀로 독백…신뢰도 추락하고 위기 직면
언론에 등돌리는 현실에도 반성은커녕 숫자놀음에만 치중
콘텐츠만으론 생존 역부족…독자정보 축적 방안 고민을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중 일부)
‘언론의 힘’ 역시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지난 2016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겪으며 들불처럼 일어난 ‘촛불 민심’에 우리 언론은 또다시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국민과 독자 앞에 저널리즘 본령을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간 우리 언론은 무엇이 달라졌고 등 돌렸던 독자의 신뢰는 얼마나 회복됐을까. 이 물음에 당당히 답할 언론이 없다는 게 현실이다. 다시 한 번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36개국 대상으로 조사한 <2017 디지털 뉴스 리포트>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뉴스 신뢰’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 중 23%만 ‘동의한다’고 답해 지난해에 이어 조사대상 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특히 18~24세 연령대에선 10명 중 1명(11%)만 ‘신뢰한다’고 응답해 가장 낮았다. 이어 25~34세(18%), 35~44세(22%), 55세 이상(28%), 45~54세(29%)의 순이었다. 20~30대를 중심으로 뉴스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인데 언론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스스로 자초한 위기를 망각하고 독자의 깊은 한숨을 또 다시 외면한 게 아닐지 되돌아봐야 한다. 과거와 차이점은 신뢰의 위기가 임계점에 다다라 존망의 기로까지 남은 시간이 적다는 것이다.
그동안 언론은 독자를 대변한다고 목청껏 부르짖었지만 정작 ‘우리 독자’가 누군지 잘 모른다. 사실 안중에도 없다. ‘독자를 위해서’라는 공허한 구호 뒤에 숨어 언론이 말하고 싶은 주장과 의견만 날랐을 뿐이었다. 종이신문을 찍고 뉴스가 전파를 타면 볼 사람들은 다 볼 것이라고 자신했다. 보지 않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독자보다 정치·경제권력 우선
독자들은 신문광고 단가나 신문 안에 끼어 넣는 전단지 단가를 높이기 위한 부수적인 도구일 뿐이었다. 언제든지 무료 자전거나 상품권 등으로 유혹할 수 있는 ‘숫자’일 뿐이라 생각했다.
반면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 등과는 가깝게 지내지 못할까 조바심 냈다. 권력으로부터 얼마만큼 지근거리에 있느냐가 언론사의 순위를 좌우한다고 생각했다. 정부기관·대기업의 인사를 가장 먼저 캐치하고 기사화하는 게 출입처 장악력이자 경쟁력이라 착각했다. 그들의 눈치를 살피고 때론 눈감은 이유다.
독자들이 정작 궁금해 하고 가려워하는 부분은 제대로 귀 기울이지도 긁지도 못했다. ‘왜’라는 국민적 관심사에 언론은 귀를 닫거나 외면하며 하고 싶은 말만 되풀이했다.
지난 2016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겪으며 들불처럼 일어난 ‘촛불 민심’에 우리 언론은 또다시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지만 독자 신뢰를 회복하기까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 뉴시스
이와 달리 정부나 대기업 발표는 받아쓰기 급급했다. “전원 구조”라는 집단 오보, 속보 경쟁,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표현 탓에 ‘기레기’라는 참담한 오명을 뒤집어 쓴 ‘세월호 사태’를 겪고도 언론의 반성은 그 때뿐이었다.
이런 상황은 디지털 환경에서도 반복됐다. 독자는 트래픽을 위해 동원된 ‘숫자’에 불과했다. 같은 기사를 제목이나 사진만 조금씩 수정해 반복적으로 올리는 어뷰징 기사가 온라인 생태계에서 판 친 것도,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선정적이고 낯 뜨거운 제목의 기사가 범람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트래픽에 열 올리는 사이, 그 어디에도 독자들을 위한 배려는 없었다. 독자 신뢰도가 난도질돼도 먼 나라 이야기처럼 치부했다. 오프라인의 행태가 온라인까지 그대로 전이된 것이다. 그동안 우리 언론이 독자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멈춘 언론 위에 나는 독자
언론이 썩어가는 동아줄을 잡고 허우적거리는 동안 ‘신뢰’라는 언론의 생명줄은 금 가고 화석화됐다.
언론이 독자들로부터 멀어지는 만큼 독자들 역시 언론을 외면하고 등 돌렸다. 그럼에도 ‘믿을 만한 뉴스’는 기성언론 밖에 만들 수 없다는 오만에 사로잡혀 독자들을 다독이지도, 살펴보지도 않았다.
언론진흥재단에서 발간한 <2016 언론수용자 의식조사>에 따르면 전국종합신문의 신뢰는 2010년 3.79(5점 만점)에서 2016년 3.39으로 하락했다. 이 기간 동안 지상파는 4.04→3.85, 보도전문채널은 3.90→3.74로 추락했다. 언론인에 대한 신뢰도 역시 2006년 3.0에서 2016년 2.7로 떨어졌다.
언론이 누렸던 ‘정보 독점시대’가 저물고 미디어 시장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신흥강자가 등장한 탓도 있지만, 독자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프로정신’이 없었던 게 현 위기를 자초한 측면이 크다. 언론이 미디어 위기를 말하지만, 실상은 ‘언론 위기’만 존재할 뿐인데 우리 언론만 몰랐거나 외면한 것이다.
그 틈을 타고 ‘가짜 뉴스’가 판 쳤지만 기성 언론은 손 쓸 틈 없이 속수무책 당했다. 오히려 가짜 뉴스가 활개를 치는 데 기성 언론이 지닌 정파성이 악용되기도 했다.
시민들이 스스로 기자가 돼 기성언론의 대항마 역할을 하는 것도 그동안 언론이 제 몫을 제대로 못했다는 반증이다.
미디어 신흥 강자들이 독자들의 기호에 맞는 콘텐츠를 내놓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도 언론들은 독자들을 훈계하려 했다.
지난해 불거진 ‘한경오 프레임’이 여러 논란에도 언론에 던져준 교훈 중 하나는 언론 곁에 ‘영원한 아군’은 없다는 점이다. 한겨레가 여론 역풍을 맞은 뒤 독자들의 의견이 있을 때마다 빠른 시일 내에 대응하기 위해 전담 ‘참여소통 에디터’를 둔 것도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다.
독자들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언론사는 언제든지 독자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 만큼 독자들의 눈초리는 매서워졌고, 독자들의 기호는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게리 리우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사장은 지난해 11월29일 중앙일보가 주최한 유민 100주년 콘퍼런스에서 저널리즘 미래에 대한 질문에 대해 “뉴스를 소비하는 패턴이 6개월마다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처럼 빠르게 진화하는 독자들의 소비패턴을 따라잡기는커녕 좇아가기도 버거운 반면 독자의 뜻을 따르지 못한 언론은 앞날을 장담하기 점점 힘든 시대가 된 것이다.
독자 정보마저도 포털에 빼앗겨
문제는 디지털 시대에서 독자와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의 고객은 누구이고, 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며 그 관계를 유지·확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언론이란 명맥을 유지하는 한 끊임없이 되새김질해야 할 생존의 질문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상품을 소비하는 독자를 모르고선 미래의 생존을 논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게 언론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그럼에도 언론사가 독자 정보를 수집하는 수준은 여전히 전근대적이다. 독자 정보는 그동안 종이신문을 배달하기 위한 주소지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 메이저신문사 관계자는 “전국에 신문을 배포하는 데 가장 저렴한 방식이 일종의 대리점 제도인 지국제도였다”면서 “하지만 독자적인 지국이 다 무너지면서 대부분 지국이 모든 신문을 거의 다 취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 언론이 독자 정보를 방치했던 또 다른 이유는 부가가치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론이 독자 정보를 방치하고 있던 사이 뉴스콘텐츠 유통권을 쥔 포털은 독자들의 데이터베이스마저 가져갔다. 언론사들은 기회가 날 때마다 포털에 이용자들의 뉴스 소비패턴에 대한 데이터를 달라고 소리치지만 순순히 내놓을리 만무하다. 언론은 온라인 독자들을 ‘트래픽’으로만 봤지만 포털은 독자들을 미래의 가치로 본 ‘수준 차’의 결과물인 셈이다.
생존의 열쇠는 ‘독자 퍼스트’
앞으로가 더 큰 문제다. 디지털 퍼스트, 모바일 퍼스트, 영상(비디오) 퍼스트 등에 이어 ‘독자 퍼스트’시대에서 독자 정보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할 수밖에 없다.
그 전까지 콘텐츠 형식과 이를 나르는 유통에만 관심을 가졌다고 하면 ‘독자 퍼스트 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진성독자를 보유하느냐가 그 언론사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된다.
최진순 한국경제 기자는 “레거시(전통) 미디어는 그동안 콘텐츠 형식과 유통에만 신경 썼지, 정작 독자는 안중에도 없었다”면서 “그러나 디지털환경에선 콘텐츠가 누구에게 전달되고 어떤 호응을 얻고 있는지를 광고주에게 입증해야지만 광고가 집행된다”고 강조했다.
독자 규모보다 진성 독자들을 얼마나 보유하고 이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며 이를 마케팅까지 연결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시대인 셈이다. 실제로 일본 3대 종합지인 일본 아사히신문은 2005년 회원서비스인 ‘아스파라클럽’을 개설, 독자의 의견을 기사에 반영하는 한편 각종 이벤트, 무료쿠폰 전송 등을 통해 젊은 독자층 확보에 성공했다.
한 종합일간지 관계자는 “현재 종이신문 독자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확보한 신문사는 한 곳도 없을 정도”라며 “유료화든, 후원모델이든 충성도 높은 독자를 확보하는 게 모든 것의 시작점”이라고 밝혔다.
우리 언론이 독자를 제대로 파악하고 타깃화하려는 움직임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상태다. 이마저도 일부 여력이 있는 몇몇 언론사만이 관심 갖고 실행에 옮긴 단계다.
하지만 더 이상 독자를 모르고 생존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에 이제라도 독자와의 다양한 접점을 찾아야 한다는 게 언론계 관계자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우선 독자들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 NYT의 혁신보고서의 핵심이 독자 퍼스트임에도 우리 언론은 콘텐츠 형식과 유통전략에만 관심을 가졌다. 우리 언론은 오히려 디지털 유료화가 답이라 오인해 이에 집착하면서 독자들의 저항감만 부채질했다. 이제라도 독자 정보를 축적할 수 있는 자사만의 묘책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를 위해 넘어야 할 산도 적잖다. 우선 뉴스룸과 독자를 위한 마케팅 조직이 수직 관계가 아닌 수평 관계로 전환돼야 한다. 제대로 된 독자 분석을 위해선 뉴스룸 인식이 바꿔야 한다는 것.
심석태 SBS 보도본부장은 “우리 언론은 그동안 정론지를 표방하면서 주장이나 경향성을 띠다보니 독자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며 “우리 언론이 살아남기 위해선 일반 비즈니스 업무 프로세스를 배울 필요가 있다. 추상적으로 우리 소비자는 이거라는 식이 아닌 우리 소비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직접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독자 퍼스트가 되려면 노동 유연성이 확보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신문사 관계자는 “독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대응하고 서비스를 하기 위해 여기에 맞는 인력이 필요하다”며 “새로운 인력을 뽑지 못한 상황에서 기존 인력을 재교육해 투입해야 하거나 인적 구조조정을 통해 채워야 하는데 우리 언론의 경직된 조직문화를 감안할 때 쉽지 않다”고 밝혔다.
관건은 이렇게 확보된 디지털 독자를 종이신문 독자로 연결시킬 수 있느냐다. 디지털 분야의 매출이 종이신문의 하락세를 메울 만큼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희정 한국일보 미디어전략실장은 “디지털 시대가 됐더라도 30~40대 중 종이신문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잠재적 독자를 찾아야 한다”며 “연령대, 취향, 라이프스타일 등으로 다양한 실험을 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김영훈 디지털국장은 “신문 기자들은 내 기사에 대한 반응을 확인하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 않아 자칫 데이터를 통해 이를 살핀다고 하면 기자들에 대한 정량평가로 오해한다”며 “이를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느냐가 독자분석을 위한 관건”이라고 조언했다.
[ 덧붙임 ]
등돌린 독자들을 다시 붙잡기 위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게 과연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독자 퍼스트를 실현시키기 위한 노동유연성의 확보에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혹여 신문과 방송이 앞으로도 이런 사고 방식을 고집한다면 영원히 독자와의 간극을 좁힐 수 없을 것.
신문과 방송, 즉 언론이 가장 먼저 챙겨야 할 무기는 말 그대로의 <저널리즘>을 갖추는 겁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편향되지 않는 공정 언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면 독자는 자연스레 다시 돌아옵니다. 정치 및 경제 권력의 대변인 역할이나 하는 부역자 소양으로는 절대 독자의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실에 입각한 이슈를 건드리고, 판단의 몫은 독자에게 맡기면 될 일입니다. 지금처럼 훈장질에 지적질을 통해 "무식한 독자들이여! 똑똑한 우리 언론의 말을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갑질 행태를 고집한다면 더이상의 미래는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레기>에 이어, <한경오 프레임>까지 뒤집어쓰면서도 반성 하나 없이 "지금처럼 우린 우리 길을 가겠다"고 한다면 그 모습 자체가 독자들에게는 <밥그릇 챙기기>로 비쳐질 테고, 당연히 앵벌이에 쓰레기 취급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 존경 받는 기자, 언론인 상(像)을 떠올려 보길 당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