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입학식 때는 왜 손수건을 가슴에 달았어요?
불탄의 開接禮/아내와 천사 셋 : 2010. 3. 2.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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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라고 해야 할까요?
잠시 커피를 한잔 타서 마시고 있는 불탄에게 이제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큰딸이 뜬금 없이 질문을 해옵니다.
"아빠. 있잖아요......"
"응? 그래. 왜?"
"으~응. 할머니가 그러셨는데요. 아빠랑 큰아빠랑 학교에 들어갈 땐 가슴에다 손수건을 달았다면서요?"
"응. 그랬지. 암. 그렇고 말고."
"그래서~요~. 근데 그 건 왜 달았던 거예요?"
"할머니께 여쭤보지 않았어?"
"아뇨. 할머니한테 물어봤는데 그냥 아빠한테 물어보래요."
불탄은 국민학교를 아주 깡촌에서 다니게 되었습니다. 버스나 그런 건 있는지도 몰랐고, 그저 왕복 이십리 길을 걸어서 다녔었지요. 항상 책 몇 가지를 책보라고 하는 보자기 천에 둘둘 말아서는 왼쪽 겨드랑이와 오른쪽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서 풀어지지 않도록 꽉 묶고 다녔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게도 국민학교 입학식이 있었군요.
그런데 그 때는 "앞으로 나란히"를 왜 그렇게 많이 했었을까요?
준비한 사진 기록마다 전부 앞으로 나란히를 하고 있네요. 하하...
입학식이 있는 그날은 깡촌 마을에서는 한바탕 축제 분위기가 나는 날입니다. 워낙에 깡촌이다 보니 일년에 서너 번밖에 되지 않는 그와 같은 날에는 아이들 핑계를 대서라도 일손을 놓고 함께 참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요.
아마도 입학식과 같이 마을이 온통 들뜨는 대표적인 날에는 가을에 있는 운동회가 있을 겁니다. 누가 뭐래도 깡촌에서의 운동회는 동네 전체가 함께 즐기는 잔칫날이었지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말할 것도 없이 엄마, 아빠들도 모두 나와서 공굴리기도 했고, 오재미 던지기로 박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자녀나 손주들과 함께 달리고 구르며 혹여라도 어떤 상품이라도 받게 되는 양이면 모두가 즐거운 함박 웃음을 터뜨리곤 했지요.
그래봐야 최고의 상품이었던 것은 연필과 공책이 전부였지만 그날 하루 만큼은 장날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 보따리가 날이 저물도록 이어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즐거운 날에는 입학식이나 졸업식, 그리고 소풍날도 항상 끼어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그런 깡촌에서 항상 추운 날씨 속에 맞게 되는 3월 초입의 초등학교 입학식은 부산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깡촌의 엄마, 아빠들은 그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겨울옷을 벗겨내고 한껏 멋을 내주기 위해 장만한 얇은 봄옷으로 갈아 입힘으로써 누구보다 멋진 자신의 신사 아들과 공주 딸을 만들고 싶어했지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그래서 입학식 다음날 감기 때문에 등교를 못하는 친구들도 가끔 있었답니다. ^^
그런데 한가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이 그때만 하더라도 왼쪽 가슴 부근에다가 옷핀으로 이름표와 손수건을 함께 찌르고 항상 매달고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건 입학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써 위에 있는 사진 기록에서처럼 입학생 전원의 왼쪽 가슴 언저리에는 항상 손수건을 매달고 있어야 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금 미루어 짐작을 해보건데 그때의 친구들은 징글징글하게도 누런 코를 흘리는 아이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동네에서 함께 놀 때만 하더라도 항상 함께 하는 친구들의 대부분이 흘러내리는 콧물을 훌쩍거리기 일쑤였고 또 그런 모습에 불탄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콧물이 떨어지려 하는 급한 상황에서 그 당시의 친구들이 할 수 있었던 행동이라는 것이라곤 옷소매 끝을 억지로 끌어당겨 "쓰윽~" 하니 닦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의 모습이었고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콧물이 흘러내리지 않기 때문에 굳이 닦을 필요가 없는데도 습관적으로 옷소매로 코를 닦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지요. 그래서인지 항상 친구들이나 불탄의 옷소매는 항상 그냥 문질러댄 콧물이 딱지처럼 내려 앉아 맨들맨들하니 광채를 내면서 반짝거렸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학교에서도 그런 모습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사용할 손수건을 집에서 가져 오게 했을 것이고, 그것도 보관을 잘못하여 잃어버리거나 하면 안될 것 같으니까 아예 옷핀을 이용해 가슴 언저리에 매달아 놓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학교에서는 위생적으로도 좋을 것이고, 한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개울물에 손빨래를 하던 엄마들도 단벌에 의존해야 하는 두터운 잠바가 쉽게 더럽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손수건을 챙겨줬을 겁니다.
이런 저런 예를 들어가면서 큰딸에게 설명을 해주었더니 곧바로 한마디를 합니다.
"아이. 더러워. 코가 나오면 물티슈나 휴지로 닦아야지 왜 옷에다 닦아요?"
"흠...... 그때는 물티슈도 없었고, 휴지도 없었으니 별 수 없었어요."
큰딸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마음 속으로는 빛의 속도에 해당하는 추억이 스쳐가는군요. 그래서 잠시 혼자서 뇌까려 봤습니다.
'아빠도 말이다. 지금처럼 그렇게 풍족한 세월 속에서 자랐으면 그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진단다. 아빠가 뒷간에서 일을 볼 때 호박잎으로 뒤처리를 했다고 하면 너희는 믿어줄까? 거기다가 호박잎은 잘 찢어지기도 했지만 뒷쪽은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여섯장을 미리 준비해서 볼일을 봐야 했었다는 것을(가시라고 해야 하나요? 털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무튼 실제로 호박잎 뒷편은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엄청 거칠었던 뭔가가 있었답니다.). 그리고 신문도 없던 시절이니 만큼 그 당시 가장 훌륭했던 뒷간용 휴지는 바로 일력이었다는 것을(달력은 한장에 30일, 일력은 한장에 하루. 날짜가 적혀있던 종이는 정말로 얇아서 뒷간에서 사용하기에는 최상의 조건을 갖췄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만 해도 그렇고 유치원에 있는 다른 아이들도 역시 요즘에는 코를 흘리는 아이들을 볼 수가 없더군요. 언뜻 생각해 보면 지금 아이들이 아무리 더 잘 먹고 환경이 좋다고 하더라도 건강상으로는 우리 때가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말입니다.
왜 그때는 그렇게 콧물을 많이 흘렸을까요? 실상은 지금의 아이들보다 우리 때가 더 약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그때 만큼 지금의 아이들이 야외활동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어쨌든 우리가 다녔던 시절의 국민학교 입학식 모습과 내일 있을 딸아이의 입학식의 모습은 사뭇 달라 보입니다. 어쩐지 이름표와 함께 하얗고 노란 손수건을 왼편 가슴 언저리에 매달고 처음 학교생활을 시작했었던 그 시절 코흘리개 친구들이 오늘은 무척이나 그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