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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주말을 할머니 댁에서 보내던 아이들이 공부를 하던 중 지우개를 찾은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께서 사촌오빠 것을 건네시면서 빨리 쓰고 다시 갖다 놓으라고 하셨단다. 큰아이가 그 말을 듣고 왜 오빠 것만 있고, 자기 것은 없냐고 따지듯이 묻는 바람에 무척이나 당황하셨다고. 오늘도 아이들을 데리러 갔더니 아이들 할머니께서 혀를 내두르신다.

“조 기집애 보통이 아니다. 내가 못 당하겠다. 야.”
“또 뭔 일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여기 수민이, 수성이한테 2만원씩 용돈 주는 걸 보더니 자기들도 달라고 그러더래. 그래 할아버지가 만원씩 주마고 했더니 2만원씩 달라고 했다는 거야. 언니 오빠와 똑같은 손자들인데 왜 자기들만 적게 주냐면서.”

'기특한 녀석들. 잘했다. 아주 잘했어.' 아이들이 엄마의 직장 때문에 주말마다 큰집에서 보내는 동안 혹시나 조카들에게 기죽어 지내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피력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새로웠다. 아직 돈의 가치는 제대로 모르지만 만원보다는 2만원이 더 많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고 있는 거겠지.

“아버지 주머니 거덜나신 거 아니예요?”
“어휴. 늬 아부지 걱정은 하지 마라. 절대로 주머니에서 돈 떨치는 양반 아니니까. 그리고 애들 데리고 갈 때 말야...”

말씀을 하시는 어머니께서 뭔가를 주점주점 챙기기 시작하신다. 우유에 타서 먹는 콘프레이크며,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과자 몇 개, 그리고 아이들이 잘 먹어 일부러 남겨두었다는 옥수수까지.


사실 아이들이 주눅 들지 않고 밝은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은 할머니의 배려 덕분이다. 주말만 되면 일부러 마트까지 가셔서 아이들 몫의 아이스크림이며, 과자 부스러기까지 미리 사다 놓으시기 때문에 오히려 언니, 오빠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얻어먹는 경우도 종종 있을 정도니까. 나와 아이엄마는 조카들이 우리 아이들을 혹시나 귀찮아하지 않을까 싶어 가끔 선물이나 용돈을 주면서 눈에 뻔히 보이는 아부를 하기도 하지만 할머니 입장은 또 다른 모양이다. 큰아들 아이들과 작은아들 아이들이 과자 하나 때문에 서로 자기 밥그릇 챙기겠다고 농성까지 부리게 된다면 할머니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플 것이니 미리 준비를 하시는 모양이다. 그래서 아이를 맡기러 길 때에는 양 손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들고 가기도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까지 챙겨주시는 모습은 언제나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아빠. 저요. 할아버지한테 용돈 받았어요. 아빠가 제 거 시티통장에 넣어 주세요.”

거실 쇼파 앞에 놓여 있는 탁자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있던 큰아이가 아빠를 발견하고는 쪼르르 달려오더니 어깨에 멜 수 있게 되어있는 가방을 톡톡 치면서 자랑스럽게 말한다. 아마도 할아버지께 받은 용돈을 그 안에 넣어두었으리라. 작은아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림책 한 권 붙잡고 앉아 읽기에만 몰두하면서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끼니때가 지났는데도 한사코 한술 뜨고 가라는 어머니의 권유를 뒤로 남기고 아이들을 앞세워 집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께서 또 뭔가를 봉투에서 꺼내 내미신다. 상품권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나로서는 처음 보는 형태의 것이다.

“뭐예요?”
“응. 늬 아부지가 시청에서 소일삼아 며칠 일하셨는데 거기서 나온 거라더라. 재래시장에서만 쓸 수 있다니까 가다가 시장에 들러 고기라도 사들고 가 에미한테 애들 먹이라고 해라.”
“에이. 뭐라도 아버지 필요한 거 사시라고 해요.”
“저 양반 필요한 거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개비하는 양반이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그래도 이거 좀 받기가 그런데.”
“괜찮다. 너 주는 거 아니고 우리 손녀들 주는 거니까 아무 소리 하지 마라.”

아들이 아버지께 쥐어드리는 용돈은 어머니께 건너가고, 항상 마지막에는 손자, 손녀에게 전해진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아직 건강만큼은 좋으셔서 자식들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으시는 아버지와 이제 점점 세월의 흔적을 얼굴에 담아가시지만 여전히 정정하신 어머니가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 어쩌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렇듯 건강하게 계시니까 형님네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도 친 형제간처럼 우애가 좋은 것일 게다.

매주 보는 아이들인데도 현관까지 일부러 따라오셔서 아이들의 신발이며, 옷을 단단히 여미어주시는 모습에 아이들도 얼른 할머니에게 안겨서 막바지 애교를 떨어대더니 다시 한 번 목소리를 크게 하여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할머니께는 배꼽인사와 함께 다음 주에 또 오겠다는 말을 잊지 않고 챙긴다. 아이들은 사랑으로 크는 것이라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순간이다.

PS.   본 포스트는 2009년 8월 12일, 알라딘과 네이버블로그에 송고한 글입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