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 껍질 속의 사랑 [V2. 011]
아주 가끔은 그것이 사랑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냥 스치듯 지나갔던, 그리고 치기가 앞섰던 그때가 생각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못 느꼈던 애틋했던 감정이 세월의 벽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어느 날 갑자기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밀려와서는 스스로에게 내가 정말 그때 가졌던 감정이 사랑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하고, 그 의문에 답을 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자기최면의 효과처럼 분명히 그건 사랑이었다고 확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컴퓨터를 사용하다가 아내의 메일 계정에 발송된 수많은 편지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아내가 수령한 메일의 상당수가 친구찾기 사이트로 한때 유명했던 아이러브스쿨에서 보낸 것들이었다. ‘어? 아직도 이 사이트가 있었네?’ 반가운 마음에 자주 사용해왔던 아이디와 비번을 입력해 보았더니 아무런 문제없이 접속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즐겨찾기로 링크해 놓은 영고 문예부(Y.T.C.F:젊음.사색.창조.화목)을 찾아 들어가 보았더니 마치 타임머신과 같이 낯익은 얼굴들이 햇살처럼 튀어 나왔다. 25기 동기에서부터 캐나다로 날아간 선배, 낳은 지 얼마 안 된 아기가 너무 많이 아파서 마음고생이 심했던 후배에 이르기까지. 칠판지우개를 급우의 등에 맞추고는 허옇게 지우개 자국이 나 있는 등판을 보면서 좋아라고 웃고있는 저 놈의 이름이 뭐였지? 이런 또 숙제검사에서 지적을 받은 벌로써 양초와 왁스를 복도에 바르고 개인용 청소걸레를 문지르고 있는 저 놈은 또 누구였더라? 부반장한테 칠판에 쓰여 있는 떠든 사람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며 애처롭게 빌고 있는 저 소녀는? 고개를 이리 저리 돌리며 학급친구들을 둘러보고 있는데 저기 교단 근처 한쪽에서 서너명이 둘러앉아 있다. 고개를 쭉 빼고 살펴보니 공기놀이가 한창인 것 같은데 코에 땀방울을 얹어놓고 이중꺾기를 하고 있는 저 소녀는......
지금은 태조 왕건이나 불멸의 이순신의 촬영장소로 유명 관광지가 되어버린 경북 문경에 있었던 외갓집에서 초등학교를 잠시 다니다가 부모님이 계신 서울로 전학을 했던 때가 초등학교 2학년의 2학기였다. 난 스스로 외갓집에서 잠시 머물렀다고 생각했었지만 정작 억양이 강한 내 문경 사투리와 어수룩한 내 행동은 학급 친구들에게 만큼은 호기심과 재밋거리의 대상이었을 게다. 국어시간에 책을 읽는 동안에도 킥킥대었던 그들을 무시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만큼 난 공부에 파고드는 시간이 많아졌고, 결국 4학년 쯤 되어서부터는 학급에서 꽤나 똑똑한 서울 놈으로 행세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말하는 것이며 행동하는 것에도 많은 노력을 했었고, 그 즈음의 난 완벽하게 표준어를 구사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로 그때, 난 설익은 사과와도 같은 풋사랑을 했던 것 같다. 맹맹하면서도 시큼한, 그리고 끝 맛에 살짝 묻어나는 달콤함이 있는, 뭐라고 이름 짓기에는 너무나 설익은 그런 사랑을. 적어도 그때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다음에야 겨우 그 아이가 그리워진 것을 보면 확실히 그 당시로서는 의식도 못하고 지나쳐버린 사랑이었다.
그 소녀는 공부를 참 못했다. 아니, 못했는지 잘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막내이모와 똑같은 이름을 쓰시던 담임선생님이 학급 반평균을 올려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종례 후에 남아서 공부를 하는 '나머지 공부반'을 만드셨고, 내가 학습지도를 해줘야 하는 파트너로 배정받은 급우가 바로 그 소녀였으니 그랬으리라 생각될 뿐이다. 나와 공부를 하였던 시간이 실제로 도움이 되었는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주일 쯤 지나서 짝꿍을 바꿔 앉게 될 때 분단이 틀렸던 그 소녀는 씩씩하게 내 2인용 나무책상까지 걸어오더니 당연하다는 듯 옆자리에 앉아버렸다. 그러면서도 살짝 겸연쩍었는지 배시시 웃던 소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 좋아 그 이후 나는 그 소녀의 주변을 맴돌았던 것 같다. 우리 집에서 함께 숙제를 한 기억은 없지만 그 소녀의 집에서 달달한 것을 먹었던 기억은 난다. 가끔 청소분단이었을 때는 하굣길을 함께 걸었던 것도 같다.
문득 그 소녀가 궁금했다. 즐겨찾기 링크에 걸려있는 모교들 중에서 초등학교를 클릭해 보았다. 아직도 많은 동문들이 나름대로의 사연을 가지고 친구를 찾고 있었고, 그를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이미 많은 게시글이 올라와 있었다. 졸업년도를 입력하고 결과물이 노출되기를 기다려 보았다. 어? 있었다. 그 그립고도 낯익은 이름이 그곳에 분명히 있었다. 당시에는 잘 쓰지 않았던 ‘류’씨 성을 가진 그 소녀의 이름이 눈에 아른거리기 시작하더니 벌써 생각은 30년 전 70명이 넘는 학생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다닥다닥 앉아있던 그 교실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 바로 내가 찾던 그 소녀다. 단발에 검으스름한 피부, 너무나도 동그란 눈동자에 박혀있던 빛나는 별들. 너무나 그리운 얼굴이기에 뭐라 말을 꺼낼 수조차 없다.
지금은 무엇을 할까? 아마도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자녀들 뒷바라지 하느라 그 고왔던 얼굴도 많이 상했겠지?
“뭐해요? 그렇게 멍하고 있으니 바보 같잖아요?”
“응? 어...... 그냥......”
그 이름에 마우스를 가져가 보니 손가락 모양으로 바뀐다. 다행이 링크는 살아있나 보다. 클릭을 해 보았더니 프로필은 모두가 비공개다. 메일보내기는 서비스문제로 사용할 수 없단다. 문자보내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구입해서 충전해야 되나보다. 그렇다고 문자를 충전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하겠다. 프로필을 등록한 것이 아주 오래되었다면 핸드폰 역시 사용을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고, 혹시 변동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갑작스레 문자를 날렸다가는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는 사람이에요?”
“응? 아...... 그냥 클릭하면 무슨 화면이 뜨는지 궁금해서. 이렇게 뜨는구나.”
아내에게 숨길 이유는 없었을 텐데 선뜻 그렇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리며 내 프로필을 확인해 보았더니 나 역시 모든 것이 비공개로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이런 공간에 모든 것을 공개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기도 하다. 또 쉽게 연락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지금에 와서 무얼 기대하겠는가. 추억은 온전히 추억 속에서 숨 쉬고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오늘, 30년이란 세월을 흘려보낸 지금 이 시간에 난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랑이라는 것을 잠시 꺼내 어루만져보고는 다시 추억의 한켠으로 날려 보내고 있다.
PS. 본 포스트는 2009년 9월 23일, 알라딘과 네이버블로그에 송고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