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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린이니? 아빤데..."
"네, 아빠."
"아까는 아빠가 말이야... 괜히 소리지르고 윽박질렀던 거 같애. 그래서 말인데..."

뭔가 불안한 느낌이 떠나지 않고 이어지졌다. 목에 가시가 걸려 있기나 한 것처럼 시간이 갈수록 불안해지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아빠는 휴대폰을 통해서라도 큰 딸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사과의 말은 바꿔 받은 작은 딸에게도 이어져야만 했고.


본의 아니게 투잡생활을 하고 있는 아내가 이제 3~4일이면 끝난다는 설렘을 남기고 출근을 하고 난 뒤의 아침이다. 방학을 맞은 후에는 매일 같이 두 딸을 할머니께 맡기고 출근을 해야 하는 아빠이기에 두 딸이 오늘 입을 옷들을 다 챙긴 것을 본 뒤 서둘러 욕실로 향한다. 아빠가 씻고 있을 동안 너희도 얼른 씻고 준비하라는 말을 잊지 않은 채.

샤워를 끝낸 아빠가 출근 준비로 바삐 움직인다. 짧은 머리카락을 말리면서 로션을 바르고, 속옷과 양말까지 순서대로 챙겨 입는다. 목에 목도리까지 두르고 나서 외투에 손을 뻗으려는데, 아뿔싸! 그때까지 작은 딸의 모습은 내복 차림이지 않은가.

순간 아빠 눈에서 불꽃이 튀어 오른다. 뭐하느라고 지금껏 옷도 챙겨 입지 않고 있었냐고, 양치와 세수는 한 것이냐고, 오늘 학교에서 특기적성교육으로 수업 받을 원어민영어 교재는 챙겨 놓았냐고... 쉴 새 없이 퍼부어지는 아빠의 윽박지름에 작은 딸은 겁이라도 집어 먹었는 지 울먹거리기 시작한다.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는지 아빠의 공격 화살은 애먼 큰 딸에게 다시 겨눠진다. 언니가 돼 같고 동생이 저러고 있으면 혼을 내주던가, 아님 빨리 서둘르게 채근이라도 했어야지 지금껏 넌 뭐 했냐고..

우여곡절 속에서 집을 나서며 바삐 걸음을 옮기려는데 아무려면 아직 어리기만 한 두 딸의 발걸음이 아빠의 것을 어찌 좇을 수 있었으랴. 앞서 걷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두 딸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다 불쑥 양 손을 내미는 아빠의 표정은 참으로 가관이었으리라.

그런데...  '엉?'

두 딸의 손을 하나씩 잡고 걸음을 재촉하던 아빠는 작은 딸을 잡은 쪽 손에서 전해지는 느낌이 괴이함을 느낀다. 살짝 고개를 틀어 자세히 살펴 보니 아빠가 작은 딸의 손이라고 잡고 있는 것이 손이 아니고 방한복 소매 속으로 쏙 들어간 손으로 움켜쥔 소매이지 않은가.

오늘따라 장갑까지 낀 아빠인지라 둔감해진 감각 탓에 장갑을 끼지 않고 집을 나선 작은 딸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 순간적으로 지금 있는 위치와 집까지와의 거리를 가늠해 보고는 장갑을 가지러 되돌아 서는 것을 포기해 버리는 아빠다.

"오늘은 어제보다 날씨가 많이 풀린 것 같은데 너흰 어떠냐?"
"네. 어제보다 따뜻해요", "어제보다 안 추워요."

참새 새끼마냥 저마다 날씨 소감을 밝히려는 두 딸의 재잘거림, 이어지는 여러 생활 이야기, 하루 앞으로 다가온 큰 딸의 생일파티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할머니댁이 저만치 보인다. 마치 공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짧게 느껴진다는 두 딸과는 달리 아빠의 얼굴에는 여전히 조급함이 어려있다.

저녁에 일찍 데리러 오라는 두 딸의 말이 오늘 11시 30분에 있을 원어민영어 수업을 잘 듣고 오라는 아빠의 말과 묘하게 뒤섞이면서 몇 시간 뒤를 기대케 한다.

사무실에 도착해 잠시 업무를 보던 아빠, 속죄를 하기 전까지는 마음이 편할리가 없다. 심호흡 한 번 크게 내쉬고, 입력 되어 있는 큰 딸 휴대폰 번호를 누르는 아빠의 머릿속에는 '미안하단 말 한다는 건 참 힘든 거야. 특히 애들한테는...'이란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