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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날에는 추억을 먹는다



언제였을까?

그래! 아마도 20년도 훨씬 지나버린 오래 전 어느 날이었을 게다. 갑자기 조용한 클래식 음악을 듣고 싶다며 같은 과 친구를 달콤한 말로 꼬득였던 바로 그날, 그리하여 결국 천안의 어느 클래식 음악감상실로 기세등등하게 원정을 갔던 희미한 기억 속의 바로 그날이.

주워 들은 클래식이 별로 없었던 탓에 비발디의 "사계" 중 가을을 들려 달라고 신청해 놓고는 잔뜩 폼이나 잡아볼 요량으로 블랙의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착 가라앉은 목소리의 여자 DJ는 신청메모지에 몇 자 끄적거린 사연을 들려주고 있었다.

"휴~~~"

바로 옆 테이블에서 한 여학생이 길게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심상치 않은 얼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간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이 발동했던 나는 찬찬히 그녀에 대한 감시의 안테나를 세우며 마침 곁으로 지나가고 있던 서빙직원을 불러 세웠다. 부탁한 메모지에 빼곡히 적은 사연은 잠시 후 DJ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음악이 멈추고, DJ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다음은 지금 음악과 함께 들려드린 사연에 대하여 답글 형식으로 보내 주신 사연이네요..."

그리고는 그 메모지에 쓰여 있는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중략) 세월이 흐른 뒤
그대의 사랑이 지금과도 같거들랑
내 지금의 사랑도 역시
그대의 사랑처럼 그날을 위해
작은 음악으로 남으렵니다...."

의도적으로 던진 내 시선에 그녀의 눈이 맞춰졌다. 순간 음악감상실에 밝혀놓은 조명을 모두 합친 것보다 강할 것 같은 스파크와 충격이 느껴졌다. 귀와 심장으로 들려오는 두근거림은 음악실 엠프를 최대치로 올려놓은 것보다 더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색한 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 용기를 내어 그녀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말을 건넸다.

"잘 아는 주점 있으면 앞장 좀 섭시다. 오늘 같은 우중충한 날씨에 기분 좋게 한 잔 하고 싶은 거니 걍 토씨 달지 말고요"라고. 그 말이 먹혔는지 천안에 내려갈 땐 둘이었지만 어느새 셋으로 불어난 우리는 꼭지가 돌 때까지 동동주를 퍼 마실 수 있었다.

부어라 마셔라... 테이블에 동동주 호리병이 예닐곱개 널부러져 모두 혀가 꼬이기 시작할 무렵, 조금 친해졌다고 야자를 해대는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가관이었다.

"넌 작가나 될 일이지,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경영을 하겠다고 설쳐대냐구..."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난 여전히 작가의 꿈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 오늘은 왠지 흩뿌려지는 빗방울 탓인지 순수하게 문학을 사랑했던 그 시절이 떠올려진다. 언제까지나 그리워 할 나만의 추억과 그날 이름도 물어보지 못하고 헤어진 그녀의 마지막 술주정도 함께...     - 050914. 불탄(李尙眞)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