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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린 눈 비벼가며 주점주점 양복을 챙겨 입고 나서 힘차게 현관문을 열어 제꼈더니.... 오늘도 눈발이 사발이다. 그제 밤, 그리 펑펑 내리셨으면 됐지 뭬 성이 차지 않았다고 오늘은 아침부터 이리 야단이실까.

'우산이 있었던가?' 혼잣말을 하며 신발장 주변 탐색에 나섰더니 꼬마(=아내)가 지난 여름에 버리려 한 구석에 쳐 박아둔 낡은 우산 하나가 보이기는 하네 그려.'그래도 양복 입고 출근하는데 이렇게 다 찢어진 우산을 쓰고 가야 하다니...' 그래도 없는 것 보단 낫겠다는 생각에 잘 펴지지도 않는 우산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쳐 쓰고 전철역으로 용감하게 돌진할 수밖에.

그런데 오늘따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짜증과 불만은 만땅, 허나 출근을 재촉해야 하겠기에 비좁은 공간에서의 개스작용까지 가까스로 참아내며 사무실에 도착했다.



가볍게 아침 업무에 대한 의견을 나누려는 생각에 직원들을 둘러보니 다들 엊저녁에 주님(술)을 상당히 격하게 모셨던 모양인지 가관들이었다. 어찌 풀어가야 하나 고민하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데 직통으로 울리는 전화 벨소리가 귓고막을 때려왔다.

"여보세요?"
"오빠? 오늘 목소리 왜 그래?"

이런... 정말로 꼬마는
왜 그런지 몰라서 묻는 것일까? 나중에 출근한 신랑이야 어찌 되건 말건 자기만 예쁜 3단 꽃무늬 우산 쓰고 갔으면서 말이다. 그나마 낡은 우산이라도 챙겨놨으면 타박이라도 안했으련만.

"아냐, 그냥... 근데 왜?"

조금은 달뜬 목소리로 꼬마가 설명한 내용인 즉슨, 자기가 다니는 회사 홈페이지가 정식으로 오픈했으니 회원으로 가입해 달라나 어쩐다나. 뭐, 그
럴 때 묵묵히 "그러마" 라고 해야 한다. 만에 하나, 겁(대가리)을 상실한 채 장난으로라도 "시로 시로"라는 답을 했다가는 강도 9.0의 꼬짐힘으로 보복을 당할 테니까.

"그래? 당연히 가입해야쥐~~ 그리고 우리 회사 직원들도 가입하라고 꼬셔볼까?"

꼬마가 만족스런 웃음소리를 남기며 전화를 끊는 순간, 나는 사정 없이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어떻게 직원들까지 회원가입을 시켜야 할지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에이 씨, 걍 직급으로 밀어 부쳐?'

그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뜬금 없이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고, 곧바로 내 입에서는 웃음이 흘러 나왔다. 
다이어트를 시작한다고 만인에게 공표했다는 꼬마와 퇴근이 늦어 거의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던 내가 라면을 놓고 한바탕 벌인 자그마한 전쟁이 생각났던 거다.

"배가 고프네...? 이럴 땐 떡국 떡 듬뿍 넣은 라면 한 그릇 먹으면 정말 짱일텐데..."

내가 하는 말을 들은 꼬마, 갈등하기 시작했다. 정말 먹는 것에 약한 우리 꼬마다. 눈빛이 흔들리고 주방 쪽으로 눈길을 자꾸 주는 것을 보니 직감적으로 성공했다는 느낌이 '유레카~'를 외쳤다던 어떤 코쟁이의 감격보다 더 크게 종소리 처럼 들려 왔다.

"잠깐만... 좀 기다려 봐."



물이 끓는 소리, 라면을 부셔 넣는 소리,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는 소리, 젓가락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 결국 꼬마는 김이 모락 모락 나는 라면을 엄청 큰 세숫대야 같은 냄비에다 끓여오게 되었고, 둘은 정말로 용감무쌍하게 먹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전쟁도 이런 전쟁이 없었다. 한 젓가락이도 서로 더 먹겠다는 벌이는 필사의 전쟁, 생존의 문제, 서바이벌이었다.
거의 코를 박고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먹던 꼬마가 기가 막힌 타이밍에 양보의 한마디를 했는데, 그 말이 내게는 사형선고나 되는 것처럼 절망적으로 들려왔다.

"이제 오빠 다 먹어... 대신에 설겆이는 오빠가 해야 돼. 알았지?"

국자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아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보니 딱 한 개 남은 떡국 떡과 끊어진 면발 몇 가닥만 헤엄을 치고 있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