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넷 - 그리고 겨울
불탄의 샵과 플랫/창작시 단편시 : 2012. 4. 2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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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이 켜진 내 방은 창 밖의 공간과는 다른 세상의 내음을 가지고 있다. 하얀 죽음을 아파하며 가늘게 슬퍼하던 풀꽃은 자신이 버림받은 이 세상을 탈출하려 울먹이고 있다. 누구나처럼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써 웃음 지었던 그 짧은 시간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소리로 바스락 거린다.
난 혼자다. 낯선 인간들에게서 진실을 강요하면서도 자신은 내 보이기를 주저하는 모순이 얼어버린 가슴으로 들어오고, 잊혀진 기억을 안타까와 한다. 혼자라는 이유로 좋아했던 기억은 멀어져 가버리고 지금이라는 시간에는 견디기 힘든 아픔으로 다가온다. 외로운 세대를 살아가면서 하나씩 지나쳐 가는 주위의 이파리들을 영원히 내 곁에 두고싶다는 자기 욕구에 몰입되어 스스로 늪에 빠져든다.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할까? 아픔은 순간마다 느껴지고 영원으로 이어지기를 원하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 느껴야 하는 그것은 너무나 벅찬 것이기에 혼자서 이렇게 아파하고 있다. 내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죽였던 시간이 지금은 더 큰 가치로 전해온다. 금방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삼키면서도 그 이유를 몰랐었다. 갈라진 목을 축이려 마른 수돗가를 방황하면서도 그 이유를 몰랐었다. 어서 빨리 참 모습을 알고만 싶다. 밤이 깊었다. 긴 소설을 읽으며 자신의 여섯 줄을 시험해야만 한다.
2
조용한 음악 소리에 "마음과 마음"을 알았다. 불빛 조정으로 발그스름해진 공기가 다정스럽게 속삭였다. 예외없는 법칙이 없다는 말을 굴리며 근거도 없는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슬픔이 온 몸을 억압해 왔다.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끌려가긴 싫다.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한다는, 만남은 우연이며 이별은 필연이라는, 만남은 이별을 위한 첫째 조건일 뿐 그 이상의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 그 전부를 부정하고 싶다. 인간은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을 통해 성장한다고 한다. 오늘의 짧은 만남을 통해 자신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얼마 만큼의 값어치를 가지고 있었을까?
몇 가지 의문을 가진 채 어두운 골목을 지나 집으로 왔다. 내 방의 스위치를 올렸다. 잠깐 동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잠깐 동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방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네 개의 판넬 중에 유난히 눈에 들어 온 판넬. 그것은 알지도 못하는 한 긴간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가방을 뒤져 또 하나의 시를 읽어 보았다. 이건 나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강한 곡선을 그리며 정신을 지배했다. 삶이라는 것에 우리 - 유독 나 혼자일 수도 있겠지만은 얼마 만큼의 애착을 갖고 있을까? 가끔은 생이 싫어진다. 아주 가끔은 생을 포기하고 싶다 하지만 더 많은 시간에는 나를 알고만 싶다. 삶을 자신있게 그리고 싶다. 풍경화를 그린다. 맨 앞에는 시간의 흐름이 있고, 그 뒤엔 삶의 모습이 있고, 맨 마지막엔 엷게 채색된 내가 서 있다. 난 걸어가고 있다. 이상은 날아가고, 곧 공간을 써 내려가는 소설의 겉장을 훔친다. 어지럽다.
과일 냄새의 향긋함을 지닌 샴푸를 머리를 감고 자야겠다. 비누 냄새를 낱고 싶다. 그것은 그리운 이의 냄새. 단 냄새... 달다... 냄새는...
3
책상 위에는 잔하게 탄 뜨거운 커피 한 잔이 있다. 내 가슴엔 잔잔히 비가 내리고 있다. 이미 안주할 곳을 잃어버린 심성(心聲)은 음이 틀린 키타의 G선 위에 정결하게 묻어 있고, 바람이 부는 창틀엔 어지러운 연모가 흩어져 있다. 언제부터인지 연습장의 얇은 부피는 사라져 보이지 않고, 일기장의 찢겨져 나간 한 페이지가 공허해 보인다.
오늘은 이 달의 마지막 날이다. 마음 정리가 급하다. 다음 달이 오기 전에 준비를 해야 한다. 차가운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 커피는 이제 다 식었는지 더이상의 김은 올라 오지 않는다. 꺼져가는 불꽃의 아쉬움이 짙게 자리하고, 사위어가는 별빛 마냥 멀게만 보인다. 미역처럼 너덜대는 자신을 미워한다. 조용한 곳에서 물소리가 난다. 내 마음늘 내리고 있는 빗줄기가 흘러가는 곳이다. 가까운 곳에서 - 스위치를 내렸다.
4
하늘이 무너진다. 무거운 어둠이 금방 그림자를 삼킨다. 눈이 오질 않아서 다행이다. 겨울이 다할 때까지 계속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땅이 패인다. 그 나약한 빗줄기에 상처받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눈을 가장해서 숨기는 것 보다는 더 솔칙해서 좋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또 순수를 치장하려면 그 만큼의 거짓이 더 필요하다. 실망을 하더라도 그냥 그대로가 좋다.
난 겨울을 좋아한다. 난 비를 사랑한다. 오늘같은 날이 제일 좋다. 작년 크리스마스 다음날 친구 집에서 썼던 낙서를 전해 받았다. 무척이나 기쁘다. 소중한 나의 마음이다. 한 장 밖에 남지 않은 달력을 보니 왠지 허탈한 기분이 든다. 울적한 기분을 이겨낼 수 없다. 창물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비를 맞는다. 시원하다. 차갑다. 그래! 이것이 그냥 앉아 있는 것보다 더 편해. 물을 차고 싶다. 비를 마셔 버리고 싶다. 크게 웃고 싶다. 지구가 흔들리도록... 내 몸이 부서지도록...
무언지 모를 걱정이 항상 참새 가슴만한 내게 잔재해 있다. 피가 역류되도록 소리쳐 봐도 사그러 들지 않는다. 다시금 아무 거리낌없이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져 오늘 또 무엇을 위한 낙서를 한다. 아픔 밖에 써 내려가지 못하는 내 상처를 심한 욕지꺼리로 위로하면서 가늘게 떨리는 손 끝은 어둠을 갈망하며 형광등 전원을 찾아 헤맨다.
베개 옆에 놓인 일기장 둘... 그리고 키보드가 하나... 어둠이 셋.
- [永光 24號] 1984년 겨울作. 080504 수정. 불탄(李尙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