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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기침체 속에서 대기업들이 중소기업들의 영역에 진출하는 사례가 두드러지면서 문어발 확장에 따른 마찰이 잇따르고 있다. 대기업들이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기보다는 우월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중소 경쟁업체들의 영역을 빼앗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 것이다. 이와 함께 정부와 중소기업의 대책도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근 대기업의 사업영역이 중소기업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신세계는 주유소사업과 와인사업에 진출한데 이어 매장 면적 330㎡ 안팎의 작은 이마트인 ‘슈퍼슈퍼마켓(SSM)’ 진출에 앞장서고 있고, 통신기업 LG데이콤은 다소 생뚱맞은 웨딩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삼성전자는 CCTV 등 영상보안 시장 공략에 나섰으며, LG전자는 정수기 렌탈, 안마기 판매 등 헬스케어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SK텔레콤도 지난해 말 자회사 SK마케팅앤컴퍼니를 통해 중소업체가 해오던 휴대전화 결제 시장에 뛰어들었다.




대기업이 이같이 신규시장 창출보다 중소기업이 애써 형성한 틈새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기존 사업의 성장 정체 때문이거나 경기침체기에 돈이 되는 사업이면 가리지 않고 영역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돈’ 되면 가리지 않는 영역 침탈


지난 5월 신세계는 주유소사업에 이어 와인사업에도 진출했다. 수입 가격을 확 낮춰 국내 와인시장의 판도를 바꾸겠다는 계획으로, ‘신세계 L&B’를 설립한 것이다. 기존 와인업체 시장점유율은 1위 금양인터내셔날, 2위 두산 등의 순으로 4~17% 사이이며 메이저 수입업체들을 전부 합해도 50%가 되지 않는다. 그만큼 중소기업들의 몫이 존재했다.

하지만 신세계 L&B가 목표대로 올해 85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2013년까지 1,000억 원까지 매출을 끌어올린다면 국내 와인시장은 대기업의 몫이 된다. 대기업이 와인시장에 뛰어들면 와인시장이 더 커질 것이라는 기대효과도 있지만 5,000억 원도 안 되는 와인시장에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대기업까지 뛰어들면 종전 중소업체들의 독점수입권은 결국 대기업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전자·통신업체들도 중소기업의 사업영역에 진입하고 있다. LG전자는 지난해 말 헬스케어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한 뒤 일본 히타치와 손잡고 정수기와 안마의자 사업에 뛰어들었다. 국내 정수기 시장은 지난해 기준 약 1조 4,000억 원 규모로 웅진·청호·교원 3사가 약 75%를 점유하고, 나머지 시장을 군소 중소업체들이 차지하고 있다. LG전자는 현재 33% 수준인 정수기 보급률이 2012년에는 40%까지 올라갈 것으로 보고 기존 업체 제품과 차별성이 있는 고급 정수기 시장에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지난 4월 정수기 4개 모델을 출시한 이후 석 달 만에 2,000여 대를 판매해 기존 업체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앞서 LG전자는 800만 원대의 안마의자 사업에도 진출했다. VVIP 고객층을 겨냥한 LG의료용 진동기 역시 일본 히타치사와 함께 공동 연구해 개발됐다. 안마의자 시장은 10년 전 일본에서 큰 붐을 일으킨 바 있어 국내 시장에서도 성장이 예상된다는 것이 LG측의 설명이다. 하지만 국내 안마의자 시장은 발전하기도 전에 대기업의 진입장벽에 중소기업의 진출이 가로막힌 상황인 셈이 됐다.

인터넷과 전화 사업을 하는 LG데이콤은 지난 5월 열린 주주총회에서 웨딩사업 강화 계획을 밝혔다. 지난해 7월 토털 웨딩서비스 ‘마이e웨딩’을 선보인 이 회사는 수수료 중심 사업 모델을 넘어 컨설팅, 혼수정보, 여행정보, 결혼박람회 등 포괄적인 웨딩사업을 펼치기로 했다. LG데이콤은 이미 서울, 부산, 광주 등지에서 웨딩박람회를 개최했으며 전국 7개 도시에 오프라인 센터를 개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SK텔레콤도 지난해 말 자회사 SK마케팅앤컴퍼니를 통해 중소업체가 해오던 휴대전화 결제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에 다날·모빌리언스 등 기존 휴대전화 결제 업체들은 “대기업이 지배력을 이용해 중소기업이 특허로 개척해온 시장에 무임승차하려 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SK마케팅앤컴퍼니는 “기존 업체들과 사업영역이 겹치지 않도록 협의해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영상보안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CCTV 카메라 등 영상보안 시장은 매년 두 자릿수 성장률을 보일 정도로 호조를 띠었는데, 지난 4월 삼성전자가 세계 최고 해상도의 지능형 CCTV 카메라 A1 시리즈 18종을 내놓고 전략사업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특히 삼성테크윈도 CCTV사업을 진행하는 상황에서 삼성전자까지 가세하자 중소기업들의 반발이 일고 있다. 게다가 LG전자, SK네트웍스, 글로벌 대형업체까지 가세하면서 국내 영상보안 시장의 재편은 불가피해졌다.

이 밖에 포스코가 중견 해운물류업체인 대우로지스틱스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고, 한국전력은 운송비 절감 차원에서 해운업 진출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기아차그룹의 종합 물류회사인 글로비스도 해운업 진출을 본격화할 태세다. 이 때문에 기존 해운업계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한국선주협회는 “대량 화주의 해운업 진출은 해운산업의 근간을 뒤흔드는 발상이다. 철광석 수송 전문선사와 철강재 수송 중소선사들이 설자리가 없어져 해운산업의 기반이 와해될 수 있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설비투자 없이 ‘문어발’ 계열사만 늘리나


최근 대기업의 영역 확장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유통업계의 ‘골목 상권’ 진출이다.

홈플러스·롯데·GS리테일 등 대형 유통업체들은 여론의 따가운 지적에도 불구하고 330㎡(100평) 안팎의 소형 점포 사업에 공세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홈플러스는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라는 이름으로 소형 슈퍼마켓 152개를 주택가와 도심 지역에서 운영하고 있다. 롯데쇼핑은 대형마트보다 작고 슈퍼마켓보다는 큰 대형 슈퍼마켓(SSM) 110곳을 운영 중이며, GS리테일도 ‘GS슈퍼’ 117곳을 출점했다.

영세 점포 상인들은 “대기업의 슈퍼마켓 사업을 규제해야 한다”며 반발하지만 대형 유통업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이다. 신세계 이마트는 연내에 30개 이상의 소형 점포를 낼 계획이다. 다른 유통업체들도 SSM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소비자 편의를 위한 것으로, 영세자영업자들의 수익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게 이들 기업의 주장이다.

하지만 정부와 업계의 자료에 따르면 대형마트의 성장과 재래시장 몰락에는 인과관계가 확인된다. 2004~2008년 5년간 대형마트 매출액은 9조 원 이상 늘어난 반면, 재래시장 매출은 9조 원 이상 준 것으로 나타났다. 대형 유통업체들의 무차별 공세 탓에 2004년 273개였던 대형 마트는 지난해 385개로 무려 41%가 증가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학계와 재계에선 “대기업들이 적극적인 기술 개발보다는 중소기업들이 형성해놓은 시장에 숟가락을 얹거나 손쉬운 M&A를 통해 몸집을 불리는 데 주력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경제위기에도 국내 대기업들은 계열사 수를 늘리며 몸집 불리기에 나선 것으로 나타났다. 6월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자산총액 상위 10대 그룹의 계열사는 478개로 1년 전에 비해 40개 늘었다. 외환위기 당시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 문제가 되면서 계열사 수를 줄였던 대기업들이 2005년부터 계열사를 다시 늘려온 결과다.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대기업들이 회사를 새로 설립할 경우 유통, 전산, 물류, 광고 등 중소기업의 영역을 침범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도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재벌로 경제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 부분을 심각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일이 잇따르자 일각에서는 중소업체들의 사업 분야에 대기업이 참여하는 것을 제한했던 ‘중소기업 고유업종제도’의 취지를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중소기업들은 2006년 12월 완전히 폐지된 이 제도를 부활시켜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운 대형업체들의 영역 확장을 일정 선에서 견제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어려운 경제환경에서 중소기업의 자생력을 키워주려면 고유업종제 같은 다양한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지속적인 협의로 조정 이끌어내야


이와 함께 중소기업 스스로의 대응도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대기업의 중소기업 영역 진출에 대한 강력한 항의와 조정 신청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나오고 있다. 사업영역에 대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자율조정을 거쳐 접점을 찾되 여의치 않을 경우 정부의 강제조정을 통해 시장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올 6월 현재 중소기업청과 관련업계 등에 따르면 맞춤양복, 재생타이어, 상업인쇄(패키징) 부문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사업영역 중복논란이 빚어지고 있는데 정부는 자율조정이 되지 않을 경우 ‘사업조정심의회’를 통한 강제조정에 나설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중소업체들의 신청으로 사업조정이 진행 중인 분야는 맞춤양복(제일모직), 재생타이어사업(한국타이어ㆍ금호타이어), 상업인쇄(패키징ㆍ한솔PNS) 3건이다. 정부는 대기업의 진출이 중소기업 경영에 심각한 피해를 줄 경우 대기업에 강제로 조정명령을 내릴 수 있다.

맞춤양복의 경우 제일모직의 맞춤양복 시장 잠식여부를 놓고 2년 6개월째 분쟁을 벌이고 있으며 현재 제일모직 제품의 가격대와 매장수를 조정하는 선에서 합의를 모색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기준안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쇄정보연합회와 한솔의 패키징사업 공방은 영역 침해에 대한 양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며 2년째 갈등을 빚고 있다.

중소기업의 지속적인 항의는 원만한 조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2007년부터 아연말분말 제조사업 진출 여부를 놓고 중소업계와 치열한 신경전을 벌여왔던 고려아연이 그 예다. 아연괴를 독점 생산하는 고려아연으로서는 페인트용 아연말시장에 뛰어들 경우 일관생산체제를 갖추기 때문에 한마디로 ‘땅 짚고 헤엄치는’ 사업이었지만 중소업계가 “고려아연이 분말사업에까지 손을 댄다면 원자재 조달이나 가격경쟁에서 불리해져 고사위기에 몰릴 것이다”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서자 3년간 분말사업에 진출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롯데칠성음료의 경우 그동안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만들어오던 커피음료의 알루미늄캔을 자체 생산으로 바꾸려다 중소업계의 의견을 수용해 기존의 OEM 계약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최근 글로벌 경제위기를 맞아 대기업들이 추진해오던 신사업을 아예 포기하거나 중소업계와 협력 체제를 구축하는 등 상생의 지혜를 발휘한 사례다. - 기업나라 조득진 객원기자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