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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였을까? 찬비 곱게 내리던 가을의 문턱에서 감기처럼 찾아온 사랑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떨쳐내지 못한 채 끝내 어설프게 고백을 했던 것이. 그리고 낙엽이 지는 계절과 순백의 계절을 넘어 화향으로 가득한 신록의 계절을 이겨내고서야 비로소 장엄하게 타오르는 태양을 바다에서 보게 되었던 것이.

동아일보, 1988.04.12.

서로의 생각은 아주 많이 달랐다. 살아온 환경과, 살아가는 현실과, 꿈꾸는 미래가…. 하지만 두 눈은 서로를 응시했고, 내 한 쪽 어깨는 항상 그를 위해 비워두었으며, 바알갛게 번져가는 입술을 탐닉하는 순간 만큼은 너무나도 진지하게 서로를 느꼈다. 손으로 전해오는 체온으로, 눈으로 투시되는 시선으로, 거칠게 들려오는 숨소리로, 함께 나란히 빠져든 꿈 속의 웃음으로….

불안도 없었고, 조건도 없었다. 지갑을 열어 있는 만큼의 음악을 듣고, 남은 만큼의 술을 마셨다. 그나마도 없으면 동네 앞 벤치에 앉아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이야기를 했고, 누가 듣는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노래를 불렀다. 아주 낮고 부드러운 노래, 난 아직도 널. 아! 무디팝송의 번안가사를 읊조리기도 했었다.

헤어질 때는 서로의 연락처를 모르기에 다음 번의 만남을 미리 약속했고, 그 약속시간이 지나면 서로를 볼 수 없음을 알았기에 늘 마음 졸이며 위태로운 만남을 이어갔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음 만남에 대한 말을 누가 먼저 꺼내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기억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일까?

둘만의 추억이 깃든 곳을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아주 조금 마신 술기운을 빌려 문 열고 들어갔다. 창가의 자리를 피해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피우려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순간 누군가의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리면 밀납인형같은 얼굴이 달콤하게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맞춰 까딱거리고 있었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자연스레 자리를 옮겨 항상 그랬던 것처럼 버번콕을 갖다 달라 하곤 눈을 감아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음악이 흐르고, 그의 코코아향이 흐르고, 내 버번향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흐르고….

이후 두 번쯤인가 받아 보았던 그의 카드, 거기에 적혀있던 주소는 아련한 마음과는 달리 너무도 오래 전에 기억에서 지워졌다.
안타까움의 형체도 무뎌버린 오늘이란 시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이미 잊혀진 주소를 묻어둔 마음에 열병으로 타올랐던 사랑詩를 이렇게 끄적이는 것일 뿐.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