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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준비를 마친 나는 아내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고 키스하려 했다. 그러나 아내는 몸을 움츠리더니 어깨에 얹힌 손을 툭 털어냈다.

"내가 시한부 인생이래." - 나는 그가 말하려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최소한 연봉 50만 달러, 수많은 특권… 그러나 그건 내가 사진작가로의 인생을 포기하는 대가로 얻은 것들이었다.
실의와 절망으로 가득 찼던 20대 중반을 되돌아보면 후회막급일 뿐이다. 왜 사진가로서의 내 능력에 대해 자신감을 갖지 못했을까.

 

 


멋진 전원주택과 아름다운 아내 귀여운 아이들을 가진 주인공 폴은 파리의 촉망 받는 변호사로서 성공한 인생을 사는 듯 하지만, 그의 가정은 사실 안으로부터 깊게 곪아있는 상태. 부부간의 일상적인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불안한 일상을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인생의 멘토로 여기고 있는 직장 상사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며, 주인공 본인 스스로도 지난 날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 아쉬워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삶에 대한 억지 만족은 불만과 불안의 반증하며,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예고하고 있다.


"날 망가뜨린 건 당신이야. 집에서 살림만 하는 동안 나는 낙오자가 되었다고. 어차피 낙오자에겐 낙오자가 어울리니까."

"현실을 인정하라고. 돈은 네가 벌었지만, 네 아내랑 재미 본 건 나야."

그렇게 되기까지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병을 잡은 지 단 5초만에 모두 끝나버렸다. 어떻게 이리 간단하게 끝날 수 있을까? 살인자. 내가?


사건의 발단이 되는 아내 사라의 변심과 불륜은 주인공 폴이 아내의 내연남 그렉과 마주하며 사실로 밝혀진다. 뒤이어 주인공의 우발적 살인이 빠르게 전개되어 극의 몰입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전까지는 불안한 심리를 가급적 드러내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상충된 마음과 행동이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며 궁금증을 던졌다면, 이러한 관객의 불편한 마음이 우발적 살인에 대한 연민을 부르며, 이어지는 주인공의 행보에 심정적 동조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아들을 안고 속삭였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밤새 차를 몰고 또다시 종일 차를 몰았다. 주유소 커피를 뱃속으로 쳐 넣으며 계속 깨어있었다. 샤워를 했지만 면도는 하지 않았다. 수염으로 조금이나마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누구나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그러나 텅 빈 자유와 마주하게 되면 두려움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란 끝없는 무의 공간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니까.





사건을 은폐하고 신분을 위장한 뒤 도주하는 장면, 원작에서 긴 나레이션으로 처리되었던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는 자동차 도주씬과 몬테네그로의 황량한 바다를 마주하는 말없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한마디 설명도 없는 이 장면들은 주인공의 흔들리는 시선을 그대로 옮긴 핸드헬드 카메라의 섬세한 워킹으로 인물의 표정에 극단적으로 밀착했다가, 다시 전체로 옮기기를 반복하며 말과 글 이상의 전달력을 보여준다.


"왜 기회를 잡지 않으려 하세요? 신문사에서 처음 만났을 때에도 제가 사진을 사던 말던 무심한 태도였죠 거절하길 오히려 반길 사람 같았어요."

"댁과 다섯 시간 동안 술을 마셨지만, 자기 이야긴 하나도 안 했잖소. 갑자기 기자 정신이 발휘되면서 그 이유가 궁금해진 거요."

한때 유명해지기를 바라기도 했지만 이제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유명해질수록 사람들에게 내 과거의 존재가 드러나게 될 테니까.





주인공이 죽은 이의 신분으로 위장하고 새롭게 사진작가의 삶의 시작하는 장면들은 또 따른 비극을 암시하듯 순조롭게 진행된다. 그러나 위기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찾아보는 법칙을 그대로 드러내듯, 주인공을 점점 위기로 몰아넣는 것은 폴의 새 연인 이바나와 그를 사진작가로 데뷔시킨 술친구 바톨로메다.

가난한 무명 사진작가를 돕기 위해 그를 알리고, 더욱 가까워지려 할수록 신분을 숨겨야 하는 폴은 새로운 삶에 위기가 가까워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오래 전부터 원했던 사진작가로서의 성공과 범죄행각이 드러날 위기를 피하고자 하는 본능의 충돌, 자! 이제 어쩌지?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