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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수, 우리가 권력을 가지고 무엇을 바꾸었소?"라는 질문을 툭 던지셨다. 당황스런 질문이었다. 주섬주섬 민주주의의 발전과 정책 수립과 결정 시스템을 어느 선진국 못지않게 발전시킨 그간의 노력과 성과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씀드렸다. 그런데 별로 귀담아 듣지 않으시는 듯했다. 아하, 다른 하실 말씀이 있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권력이 아무리 커도 세상을 별로 바꾸지 못한다. 역사와 사회를 바꾸고 진전시키는 것은 결국 시민들이다. 다시 시민 속에서 역사의 바퀴를 굴려 나가야 한다. 우리 새로 시작해보자'는 요지의 말씀이었다.

'마을 가꾸기' 사례를 둘러보러 가는 길에도 대통령의 생각은 민주주의와 역사의 진보라는 화두를 참으로 집요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결국 시민의 힘이라는 믿음은 대통령의 일관된 신념이었다.


부경대학교 정치언론학부 이정호 교수가 한국미래발전연구원에 기고한 '2013년 대한민국 민주주의 위기, 시민의 힘에 달렸다'라는 제하의 글에서 소개한 노무현 대통령과의 일화입니다. 2008년 봄에서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계절, 이정호 교수가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고 제천을 거쳐 강원도로 가던 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이었다고요.

민주주의, 역사, 진보, 시민의 힘, 그리고 성하(盛夏)의 2013년…, 나열된 단어의 의미 하나하나가 모두 모여 뭔지 모를 교집합이 형성되는 듯한 느낌입니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서도 어쩌면 노무현 대통령의 그 일관된 신념을 대한민국 어딘가의 누군가는 지금 이 시간에도 한창 고민 중에 있을 것 같더랍니다. 그 누군가는…,  반드시….

이정호 교수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이라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의 단결된 힘'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아래는 이정호 교수가 기고한 글의 나머지 부분입니다. 혼자 읽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마음에 옮겨 놓았으니 누구든 일독해주시길 바랍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일관된 신념은 '민주주의와 역사진보는 시민의 힘으로 가능'

다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섰다. 그러나 권력기관에 의한 대통령 선거 개입의 진상을 규명하라는 시민들의 요구는 권력에 의해 묵살되고 있다. 선거는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정 운영을 담당할 세력을 뽑는 유일한 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권에 의한 선거 개입은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가장 중대한 범죄행위이다.

3.15 부정선거를 단죄한 4.19혁명이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1987년 6월 항쟁에서 청년-학생들이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내걸고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했을 때, 많은 국민들이 같이 길거리로 떨쳐 나와 열렬하게 호응한 것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선거가 무용지물이 될 때 국민은 더 이상 나라의 주인이 아니다.

권력에 의한 선거부정은 정치세력들 간 경쟁의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주인 자리를 강탈하는 것이기 때문에 엄중한 범죄다. 민주주의 국가의 기틀을 흔드는 국기 문란 범죄인 것이다.

민주정부 10년의 역사를 거치고도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은 다시 위기에 처했다. 미국 헌법이 ‘견제와 균형’이라는 공화주의 원리를 도입한 이래 민주주의적 가치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체제를 통해 구현되어 왔다. 공화주의 이론가들은 민주공화국을 ‘시민들이 통치자의 자의적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 나라’로 규정한다. 법치주의의 확립은 이 ‘자의적 권력’을 보다 엄격하게 제한하기 위한 시민적 저항의 역사적 성과물이다.

이후 민주주의의 발전에 따라서 법치주의는 권력에 더욱 엄정한 잣대를 적용해 왔다. 따라서 법에 의하지 않은 통치, 책임지지 않는 권력은 민주공화국의 가장 중대한 위협이다. 인류의 근-현대사는 ‘통치자의 자의적 권력’이 시민들에 의해 극복되어온 과정을 생생하게 웅변하고 있다.


부패한 권력의 선거부정은 국민주권 · 민주주의 흔드는 엄중한 범죄다

되짚어 보면, 민주공화국의 위기는 2008년부터 2010년 사이에 준비되고 있었다. 2008년 6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에 이명박 대통령은 ‘아침이슬’ 노래를 운운하면서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을 보면서, 국민들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자책했습니다”며 국민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방송을 장악하고, 종합편성방송 인-허가권을 무기로 보수언론을 기득권 동맹으로 편입시켰다.

다른 한편으로는 참여정부 시절 국민의 품으로 돌려보낸 국정원,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렇게 사유화한 권력으로 촛불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을 억압하였다. 면종복배(面從腹背)에 역사 역주행이었다. 그리하여 채 2년이 지나지 않아 촛불을 든 국민들에게 공공연하게 반성을 요구했다.

16세기 초에 이미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정치공동체가 쇠퇴하고 몰락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을 ‘부패’로 보았고, 이 부패는 권력의 균형이 깨지면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귀족들의 오만’과 지배 욕구를 법질서가 제어하지 못하면 국가는 쉽게 파멸에 이른다고 경고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새로운 귀족층은 정치-경제-사회-언론 전반에 걸쳐 견제되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권력의 선거개입, 보도 통제, 경제민주화 공약의 무력화 등은 이들 견제되지 않는 권력이 행사한 결과물이다. 국정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집권세력의 오만함은 민주공화국이 처해 있는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촛불시민들이 나서서 탐욕 · 오만한 부패권력 심판해야

역사에 공짜는 없다. 공화주의 이론가들에 따르면, 결국 정치공동체의 건강성은 공적인 삶에 참여하는 시민적 비르투(덕성)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한결같이 강조한 것 역시 시민의 참여였다.

다시 대학생들이 붙여 올린 500여개의 촛불을 시작으로 시민들이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깨어있는 시민들이다. 역사와 사회를 바꾸고 진전시키는 그 힘의 원동력인 시민들이다.

촛불을 들고 어두운 밤을 지키는 시민들이 존재하는 한, 역사의 어둠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역사는 웅변하고 있다. 탐욕과 오만과 비열함으로 민주공화국을 부패시키는 자들에게는 준엄한 역사의 심판이 가해져야 한다. 그것이 역사의 정의다.

이정호 교수의 기고 원문 클릭 → '2013년 대한민국 민주주의 위기, 시민의 힘에 달렸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