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젊은 유림단체는 입에 착착감기는 7언고시 격문으로 박근혜 하야를 권고했다
11월 14일, 영주 지역의 젊은 유림 단체 '성균관청년유도회 영주지회'(영주청년유도회)는 영주시청 기자실에서 박근혜 하야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영주청년유도회'가 발표한 시국선언문이 무척이나 특이합니다. 바로 "檄朴槿惠大統領下野(격박근혜대통령하야, 박근혜 대통령에게 하야를 권고하다)"라는 제목의 한시, 즉 7언 고시로 작성된 시국선언문이었기 때문.
父親後光衆所欺(부친후광중소기)
何以無能國柄持(하이무능국병지)
用人不公萬事戾(용인불공만사려)
守憲輕視國紀危(수헌경기국기위)
有寵奸臣日已富(유총간신일이부)
無錢百姓日已萎(무전백성일이위)
向來難堪民主退(향래난감민주퇴)
況於易從妖巫詞(황어이종요무사)
過而不改過益甚(과이불개과익심)
賊仁賊義匹婦爲(적인적의필부위)
玆檄統領卽下野(자격통령즉하야)
自不爲之民代之(자불위지민대지)
이미지 출처 - 영주타임뉴스
문득 개인적으로는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암행어사 출두 직전에 읊었다는 한시-"金樽美酒千人血(금준미주천인혈)" -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이 한시에 담긴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의 후광에 뭇 사람들이 속았나니
어찌하여 무능한데도 국정을 잡고 있는가
인사가 공정하지 않으니 만사가 어그러지고
국헌을 경시하니 국가 기강이 위태로우며
총애 받는 간신들은 나날이 부유해지고
돈 없는 백성들은 나날이 시들어간다
지금껏 민주주의가 후퇴한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요상한 무당의 말까지 쉽게 따르는구나
허물이 있는데 고치지 않으니 허물이 더욱 심하고
인을 해치고 의를 해치니 일개 필부가 되었다
이에 대통령에게 즉시 하야할 것을 권고하나니
스스로 하야하지 않으면 국민들이 대신할 것이다
이 같은 7언 고시로 된 시국격문을 발표한 '영주청년유도회'는 "헌법이 천명한 국민주권의 원칙과 민주주의 원칙이 유린당한 원인이 주권을 위임받은 통치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껍데기뿐인 진보와 보수의 대립에 기인하는 소통의 장애로 합리적 이성과 선택이 왜곡된 결과라고 진단하고, 국민 스스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박근혜에게는 "국민의 뜻을 헤아려 결단할 것", 여야 정치인들에게는 "당리당략의 이해를 떠나 계산하지 않는 정치", 그리고 국민에게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 소통"을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설명된 격문
격(檄) 또는 격서(檄書)라고도 한다. 적군을 설복하거나 힐책하는 글과 급히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 곳에 보내는 글도 이에 포함된다. 이러한 격문은 전쟁 또는 내란 때 군병을 모집하거나 침략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거나 항복을 권유할 때에 많이 이용되었으며, 또한 혁명의 주모자가 그들의 정치적 주장을 알리는 선전매체로도 사용되었다. 오늘날 대학입학 시험장 등에 내거는 현수막에 쓰여진 간단한 격려문구라든가, 전단에 자신들의 주장이나 선동·선전 등을 위한 글귀들을 인쇄하여 돌리는 것도 일종의 격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격문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일찍부터 활용되어, 주로 문자가 보급되기 시작한 삼국시대부터 선전·선동의 설득수단으로 이용되었다.
- 612년(고구려 영양왕 23)에 수나라 양제(煬帝)가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 살수대첩을 이끈 을지문덕이 적장 우중문(于仲文)에게 보냈던 <여수장우중문시 與隋將于仲文詩>
-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 있을 때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황소를 성토하기 위하여 지은 <토황소격문 討黃巢檄文>
- 1135년(인종 13)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으로부터 그 평정책임을 맡게 된 평서원수 김부식(金富軾)이 3군을 거느리고 성천(成川)에 이르러 토적(討賊)을 위한 격문을 발하여 여러 성에 보내고 다시 북진하자, 묘청에게 가담했던 성들이 중앙정부군에 호응하게 되어 결국 난을 쉽게 평정하게 되었다.
-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그때 경상도감사였던 김수(金睟)가 격문을 주고받으면서 대항한 바도 있다.
- 휴정(休靜)도 임진왜란 때에 격문을 발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승려들의 궐기를 촉구하였는데, 그때 호응한 승려의 총수는 5000여 인이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