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모든 신화(神話)에는 신격(神格)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비범한 능력을 갖고 민중을 구제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대한민국 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박정희라는 신격이 등장하는 신화에 붙들려 있었다.


신화 속 박정희는 객관적 평가의 대상이 아닌 믿음과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그의 과오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거나 다 나름대로의 뜻이 있었다.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 신화는 꾸짖어왔다.


신화 없는 사회’를 향한 마지막 관문 - 삼성

- 민주언론시민연합 시시비비 2017. 1. 24


이 신화는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일부에서 박정희는 말 그대로 신이었다. 그를 ‘반신반인’이라 부르며 초상화에 절을 하고, 곳곳에 동상을 세우고, ‘탄신일’을 기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박정희 탄신제 - 민언련


그러나 2017년 마침내 우리는 박정희 신화가 흔들리고 부서지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바로 그의 딸을 통해서. 신화의 후광을 업고 대통령이 된 박근혜는 아버지의 생각, 아버지의 통치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그 결과는 최악의 국정농단과 민생파탄이었다. 박근혜의 실패는 박정희의 방식이 틀렸음을 보여줌으로써 신화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어 놓았다.


박정희 신화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완전히 무너질 것인지, 조금 더 버틸 것인지를 두고는 견해가 엇갈린다. 촛불집회에 맞서 이른바 ‘태극기 집회’를 열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언론조작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화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조차 박정희 신화가 붕괴해가는 과정의 단면이자, 더 이상 신화가 통하는 사회를 만들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다. 눈치 빠른 지자체는 각종 ‘박정희 예산’을 줄이고 있다. 분명 한국사회는 박정희 신화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삼성’이라는 또 다른 신화


그렇다고 ‘신화 없는 사회’가 당장 도래할 것 같지는 않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신화가 있다. 삼성이라는 신화다. 재벌들은 박정희 신화 속에서 ‘하위신격’ 정도로 등장해 한국경제를 일으킨 존재였다. 그 가운데 삼성은 자신만의 신화를 만들어 왔는데, “삼성이 한국사회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이 신화는 세상이 일등만 기억하고, 소수 엘리트가 다수를 먹여 살리며, 불평등은 질서이고 규제는 악이라는 가치도 퍼뜨렸다. 삼성 총수들은 어떤 부정 비리에도 치외법권의 신격으로 군림했다. 그들의 권력과 권위를 훼손하면 한국사회가 경제 위기에 빠질 것이라는 공포가 상식처럼 자리 잡았다.


구속영장 기각 후 귀가하고 있는 이재용 - 민언련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삼성이 430여억 원을 비선실세 최순실 측에 지원한 사실이 드러났다. 박근혜 정부가 국민연금을 동원해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도운 대가라는 증거들이 제시되었지만, 이재용은 구속을 면했다. 과거 그의 아버지 이건희, 할아버지 이병철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삼성 총수는 구속되지 않았다.


수십 만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 항의하고 수십 명의 법률가들이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을 규탄하는 노숙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이재용을 구속시킬 수 있을지, 삼성 총수로는 처음으로 ‘옥살이’라는 처벌을 받게 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특히 삼성과 이재용을 다루는 수구보수언론들의 보도행태를 보면 아직 삼성 신화는 굳건해 보인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