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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2월의 9일은 아내에게 가장 미안해지는 날입니다. 이날이 바로 아내의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올해로 아내는 35번째 생일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결혼 이후로는 12번째가 되는 날입니다. 그 12번을 이어온 아내의 생일 중에 저는 겨우 두 번째로 아내에게 미역국을 끓여주었던 날이기도 합니다.

어제 저녁의 일입니다. 늦은 저녁시간인데도 아이들은 아빠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쓰고 있었습니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 다 되어가기에 그만하고 양치와 세수를 하라고 했더니 조금만 시간을 더 달라고 하더군요. 아빠 말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듣는 아이들인지라 사연이 있겠다 싶어 슬쩍 쳐다보려 했더니 고사리 같은 손바닥으로 얼른 뭔가 하고 있던 종이를 가리면서 내일 보라고 하더랍니다. 아마도 내일이 엄마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고 뭔가 축하하기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주점주점 정리를 마친 아이들이 양치와 세수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얼마 후 아내가 퇴근을 하여 돌아왔고, 피곤해 하는 아내를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 수 있게 했습니다. 아내의 낮은 코골이 소리를 들으며 주방으로 나온 저는 며칠 전 제 생일에 맞춰 아내가 들여놓은 미역가닥을 꺼내 바가지 물에 재워놓고, 꽁꽁 얼어있는 한주먹 정도의 소고기를 냉동실에서 꺼내 싱크대에 올려놓았습니다. 계량컵으로 일반미 두 컵과 현미 한 컵, 그리고 이모님이 농사지어 보내준 서리태도 한줌 쥐어서 다른 바가지에 담아 두세 번 씻은 다음 압력밥솥에 물을 맞춰놓은 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고 평상시 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저는 서둘러 아침을 준비합니다. 미리 밥물까지 맞춰놓은 압력밥솥을 가스렌지 위에 올리고 불을 지핍니다. 불려놓은 미역가닥도 손으로 꼭 짜서 올리타리아 포도씨유를 조금 두른 궁중팬에 올려놓습니다. 해동된 소고기와 간마늘 반 큰술, 국간장 세 큰술을 넣고는 조금 볶다가 멸치다시물을 적당히 부어 양을 조정하고는 팔팔 끓이기 시작합니다. 뒤늦게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던 아내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습니다.

“오빠. 잠 안자고 뭐하시는 거예요?”
“응? 오늘 너 생일이잖아. 그래서 미역국 좀 끓이고 있었지.”

전혀 예상을 못했던지 딱~ 하고 벌어진 입이 여간해서는 다물어질 것 같지가 않습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 아침도 신경 안 써도 되니까 더 누웠다 나오라며 등을 밀어봅니다. 수저를 놓고, 국을 떠서 담고, 밥을 퍼서 밥상에 올립니다. 벌써 일어난 아이들에게는 자고 있던 외삼촌을 깨우게 하고 밑반찬 몇 가지를 꺼내 접시로 옮겨 담아 아내의 아침 생일상을 아주 소박하게 차렸습니다.





아이들도 숟가락을 들다말고 안방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어제 늦은 저녁시간까지 정성들여 만든 선물을 꺼내 올 모양입니다. 하하...... 레뷰와 도브 초콜릿에서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벌였던 ‘블로그 글빨업 전략’ 책 모양을 이렇게 재활용하였군요. 아이들은 먼저 엄마한테 선물상자를 열어보게 하더니 한명 씩 차례대로 자신들이 준비한 편지를 엄마한테 들려준다고 부산을 피웁니다. 아무래도 아빠에게 애틋한 정을 가지고 있는 큰애가 아빠 생일날 먼저 선수를 쳤던 것에 대한 보복이었는지 이번에는 엄마에게 애틋한 정을 더 느끼고 있는 작은애가 먼저 편지를 읽기 시작합니다.





예진이가
2009년 12월 8일 화요일

한번 열어보세요.

받는 사람
엄마

보내는 사람
예진





엄마께
엄마 안녕하세요. (손모양 그림) 흔들 흔들 꾸벅 (사람모양 그림) 안녕하세요. 꾸벅
엄마 우리 학교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 우리한테 밥해조서 고맘습니다.
엄마 가게에서 일하느라 힘들조. 엄마가 만약에 일찍 온다면 제가 엄마한테 안마 해드리고 싶어요. 엄마 힘내세요.
엄마 일하느라 땀 뻘뻘 흘리면 제가 엄마한테 땀을 닭아주고 싶어요.
(예진이 얼굴 그림과 언니 얼굴 그림) 짝짝 짝(손모양 그림)짝 엄마 사랑하고 좋아해요.
엄마 생신 축하해요. (생일 케익 그림)


작은애가 다 읽은 편지지를 엄마한테 내미니 엄마의 눈이 촉촉이 젖어가기 시작합니다. 작은애를 꼭 안으며 메어오는 목소리로 겨우 “고맙다. 예진아. 정말 고마워.”라는 말만 계속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큰애가 벌떡 일어서더니 자신이 준비한 편지를 읽기 시작합니다.





보낸사람
예린이

밭는사람
우리엄마






엄마께
안녕하세요. 흔들 (손 모양 그림) 흔들
엄마 밥해조서 고맙습니다. (공기밥 그림)
엄마 힘드시죠. (땀 흘리고 있는 얼굴 그림)
맨날 가게 일 떼문에 힘드시죠. (땀방울 그림) 땀 뻘뻘
엄마 우리 학교 데려다 주서셔 고맙습니다. (학교 그림)
엄마 만약 힘드시면 안마해드리께요. (하트 그림)
엄마 사랑해요. (하트 그림)
엄마 생신 축하해요.

우리가족

(하트모양) 예린이가 (하트모양)

[※그리고 오른 편으로는 우리 가족의 그림과 아주 예쁜 생일 케익이 보입니다.]


실제로 큰애와 작은애가 손 모양 그림이 있는 ‘흔들 흔들’ 에서는 손을 흔들고, 땀 흘리는 얼굴 그림에서는 엄마 얼굴의 땀을 닦는 시늉까지 해오니 여간 흐뭇한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안마를 해드리겠다며 어깨를 주무르고, 토닥토닥 두들기는 모습을 즐기던 아내는 큰애의 편지읽기가 끝나자마자 눈물을 톡톡 떨어뜨립니다. 그것을 본 큰애와 작은애가 엄마한테 울지 말라며 달려드는데 어느새 아이들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있습니다. 결국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모녀는 크게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합니다.

아내가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지난번에는 외식을 시켜주겠다는 결심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만, 오늘은 꼭 맛있는 식사와 간단한 음주도 즐겨야겠습니다. 아무리 귀찮고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오늘만큼은 아내를 위한 시간으로 채워야 되겠습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