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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무척이나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며칠을 계속 눈 천지 속에서 생활을 해서 그런지
오늘처럼 이렇게 살포시 부는 바람이 너무나 좋습니다.
이번 겨울에는 정말이지 너무도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이 겨울에 들어선 어느날,
처음 내리는 눈을 맞이할 때만 하더라도
뿌려지는 은색 세상에 맞춰 탄성을 지르는 소년이 되고
또 소녀가 될 수 있었건만
어느새 내리는 눈발이 반갑지만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비처럼 깨끗한 것이 없다고.
그리고 뙤약볕이 뜨거운 날의 단비
가 더욱더 고마운 선물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보니 무더운 여름 한 날,
그렇게 뿌려지는 빗줄기는 언제나 시원했던 것 같습니다.


여름의 빗줄기와 겨울의 하얀 꽃눈이 다른 것은
비는 씻겨 내린 이후에 더욱 겸손해지지만,
눈은 쌓아 내린 이후에 더욱 포악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 함께 있는 겨울비가 가장 좋은가 봅니다.


어찌되었건,
그 흩뿌려진 하얀 눈을 쓸어 담을라치면
순백의 대명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시커멓고 지저분한 탑을 쌓는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날씨나 따뜻하면 녹아내려 안보일 터이지만
며칠째 영하권을 맴도는 날씨에서는
매일같이 누가 버렸는지 모를
그 쓰레기만이 키재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천지를 뒤덮을 듯
장엄하게 퍼붓던 눈발은 그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맑게 개이고 나면
마치 위선이나 되는 것처럼
그림자마저 숨고 맙니다.


그런 몹쓸 모습에
글쟁이의 고개는 절로 돌아가고
온 세상이 좁다는 듯 창쾌하게 퍼붓던 그 느낌은
글로 옮기지도 못한 채
가슴에도 담지 못할 술잔으로 기울이게 됩니다.


비는 온 세상을 물줄기로 씻어줍니다.
눈은 온 세상을 흰 것으로 덮어주지요.


덮는다는 건,
씻긴다는 것보다 훨씬 포근하다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조금은 응석을 부려도 괜찮지 싶은 기대감도 갖게 합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는 건,
몹쓸 놈의 함정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잘못과 부족을 커버해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흐트러짐 역시 용인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람에 날리는 눈발은
절대 스스로가 한 행동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 내려앉을 곳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보이는 족족 덮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눈으로 가려놓은 치부는 따뜻한 햇볕에,
청소하는 물줄기에,
쓸어내는 빗자루에,
언제가는 온전히 드러내게 됩니다.


덮어준 모양새는 백점짜리지만
절대로 무책임이 동일시되는 겨울날의 눈에는
그 이상의 어떤 기대도 걸 수 없는 일입니다.


조금은 스스로를 외롭게 만드는 감정
의미 없이 토해낸 호흡과도 같은 느낌
갑자기 글쟁이를 꿈꾸던 시절에나 가슴에 담고 있었을 법한 말





만남은 이별을 목적으로 하여도 좋은 것
다만, 헤어지는 시간까지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랑이어야 더욱 아름다울 수 있는 것



예전에 명제했던 만남과 이별에 대한 정의는 변함이 없습니다.
어쩌면 만남이라는 것의 다른 이름이 이별일지도 모르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그 이별이라는 것이 아플 것이고,
꽤 많은 눈물을 만들 것이며,
기약 없는 불면을 선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늘의 경험 축적은
시간과 타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갑니다.
만남의 가짓수나 정도에 따라 덜 힘들 수도 있지만,
어쩌면 아주 많은 고통 속에서 방황할 수도 있지만.


오늘은 그 만남이라는 단어에게
살아있는 애인이라도 되는 양 눈을 한번 흘겨 봅니다.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왔으니
그림자 같은 이별이나마 잠시 피해갈 요량으로


아마 다가올 날은 깨끗한 비가 내려도 좋을 것입니다.
날씨만이라도 허락한다면,
목덜미에 숨어있던 솜털까지 크게 소스라칠 만큼의
그런 빗물이 내려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림이라는 감정과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오늘은 바로 그런 날입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