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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말을 하지 않더라도 부부 사이에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배우자일 겁니다. 단 하루만 아내가 보이지 않아도 가사 일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남편이고, 곰탱이 남편의 출장으로 불안해 하며 수시로 현관문 잠금쇠 확인하는 사람이 아내라는 것을 꼭 덧붙이지 않더라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16년 동안 알아왔고, 그 중 13년이란 시간을 부부로 살아온 아내에게 밑도 끝도 없이 질문을 하나 던져 보았습니다.


"예린엄마."
"네?"
"있잖아. 나한테 제일 고마웠을 때가 언제였던 거 같아?"
"예린아빠가 고마웠을 때가 언제였냐고요?"
"엉? 뭐야 이런 썰렁한 반응은? 여지껏 한번도 없었다는 거야?"


짓궂은 농담 때문인지 아내의 눈동자가 짐짓 허공 쪽으로 치켜 떠집니다. 아마도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까 궁금해지는 순간입니다. 혹시나 쇼킹할 정도로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은근히 생기게 되더군요.





"음...... 우선 아프고 짜증날 때, 또 혼자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리고 밤새 내 얘기 들어줄 술친구가 되어줄 때? 아무튼 전 그럴 때마다 함께 있어준 게 가장 고마웠던 것 같아요."


아! 가슴 속에서 먹먹하게 전해지는 불덩이 같은 것이 올라옵니다. 울컥하니 눈시울도 조금 뜨거워지네요. 아내가 말한 그 세 가지의 경우 모두가 저 또한 아내에게 고마워 했던 순간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생각하는 것과 함께 모습까지도 닮아간다고 말하나 봅니다.


내 몸이 아프고 짜증날 때


이 경우는 꼭 부부 사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경험을 해 보았거나 상상할 수 있음직한 상황입니다. 혼자 자취나 자숙을 하고 있는 입장에 놓인 사람이라면 아주 쉽게 공감할 수 있을 테지요.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지는 것이 인간인 것 같습니다. 그럴 때 곁에서 관심을 보이고 따뜻하게 챙겨주는 사람은 오랫동안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게 되지요.

작년 초에도 아내는 담석이 생겨 몹시 아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많이 속상했지요. 빈속에 약을 먹는 것이 안쓰러워 보여 정성껏 죽을 끓이기도 하고, 밥을 짓기도 했지요. 아이들을 전적으로 챙겨야 하는 것도 얼마 동안은 할 수밖에 없었고요. 그런데도 몸이 아파서였는지 마음의 여유까지 찾지 못했던 아내는 짜증도 자주 부렸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맞받아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이미 경험상으로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간은 그냥 받아주기만 했습니다. 나중에 얼마든지 나무랄 수도 있을 뿐더러 아픈 사람과 충돌해 봐야 좋은 꼴을 보지는 못할 거란 생각 때문이었지요.





혹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거나 짝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 가족과 떨어져 혼자 생활하고 있는데 그(녀)가 혹시라도 감기라도 걸려 아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크게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런 용기 자체가 사랑을 부르는 마법의 주문으로 작용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혼자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부부가 살아가다보면 어느 한쪽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고부간의 갈등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직장에서의 불화가 가정까지 이어지는 위기를 맞게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만만치 않은 자녀교육문제로 고민하게 될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럴수록 부부라는 존재는 서로를 의지하며, 서로에게 베풀게 되겠지요. 누구보다도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배우자가 있다는 것이 이때만큼은 그 무엇보다 위안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함께 공통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배우자와 함께 얘기를 함으로써 가슴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걱정거리를 넘겨주는 것 같은 죄책감 때문에 혼자 끙끙 앓아야 할 때도 분명히 있겠지만 그래도 함께 머리를 맞댐으로써 훨씬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고민을 얘기하고 풀어줄 술친구가 필요할 때


개인적으로는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여덟 살 나이 차이가 나는 아내는 결혼을 한 이후에도 너무나 어린 행동을 많이 보였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친구로까지 느껴지더니 가끔은 저보다도 훨씬 성숙하게 보일 때도 있게 되더군요.

아내라는 존재는 여자일 수 없습니다. 시집 식구들에게는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한 남자에게는 아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아내는 분명히 여자이되 여자가 아닌 존재인 것 만큼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 아내의 이름으로 살고 있으니 가끔은 속이 상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또 그럴 때는 어딘가에다 속 시원하게 하소연도 하고 싶었을 겁니다. 물론 가장 쉽게 찾게 되는 것이 남편이란 존재였겠지요. 그래서인지 술친구로 아내가 선택한 사람이 친정 엄마나 장성한 처남들이나 직장에 있는 동료들이나 친구들이 아니라 남편이라는 사실은 가슴 뿌듯한 감정과 함께 묵직한 부담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오늘은 평소에 궁금했던 것을 직접적으로 알게 된 날입니다. 결론적으로 부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는 배우자라는 겁니다. 물론 그 동일선상에는 생명을 주신 부모님도 있고, 함께 사랑으로 낳은 자녀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하나 경중을 따질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저울로 가늠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우선 순위의 순번을 매길 성질의 것은 더더욱 아니겠지요. 다만, 그 우열을 정의할 수 없는 것들 중에 부부라는 관계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고, 아주 특별한 소중함으로 더해져야 한다는 거지요.

아내가 고마워 했던 저 세 가지 상황이 앞으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차피 사람이 계획하고 행사하는 것이기에 아주 없지는 않을 겁니다. 허나 어쩔 수 없이 겪게 될 상황이라면 언제나 아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그런 상황에 놓인 스스로의 모습이 지금보다 훨씬 듬직하고 튼튼한 바람막이로 커져있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악다문 입가는 얼얼한 느낌으로 가득하지만 너무나도 환한 웃음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