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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쯤 아내에게서 문자가 옵니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가급적 들어주자는 생각으로 무슨 내용인지 확인을 해봅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요즘 들어 조금 빈번해지는 것 같은 아내의 문자에 의한 요청이 어쩌면 상습성 유희로까지 번지게 되지 않을까 걱정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요즘에는 크게 걱정해야 할 '꺼리'가 없다는 것 만큼은 무엇보다 다행인 것 같습니다. 평온한 상태에서 무난하고 무탈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저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비록 지금의 생활터가 살얼음 판을 지나는 위태한 형국일지라도 가능한한 그 시간을 아끼며 지속시킬 수 있다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정이라는 것은 평화를 의미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면서도 가장 치열한 전쟁터이기도 합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거나 안도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언제든지 치열한 포성을 울리는 전쟁터로 돌변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무서워 해서는 안되는 것이 또한 가정이지요. 조심은 해야 되겠지만 결코 두려워하거나 경계를 해야 할 만큼 낯선 존재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아내가 보내온 문자에 곧바로 답문을 보냅니다.

"나? 난 그냥... 순대국이나 한 그릇?"

잠시 동안 응시하고 있는데도 진동으로 맞춰놓은 휴대폰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습니다. 접수를 했다는 뜻이겠지요. 순간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가는 생각 한자락이 떠오릅니다.

'근데 순대국과 닭발이 궁합이 맞기는 맞는 거야?'

1995년 여름이 되기 전 어느 회식이 있던 날, 모든 직원이 있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지금의 아내와 사내커플임을 술 기운을 빌려 선언했습니다. 물론 아내와의 교제 사실을 알고 있던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러려니 하는 표정을 보였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대다수의 임직원들은 다소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했었지요.


이미지 출처 : 웹사이트.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합니다.



바로 그 즈음 퇴근을 같이 할 수 있었던 아내와의 데이트는 거의 매일 이어지다시피 했었고, 그 당시 아내와 자주 갔던 곳이 바로 신촌로터리에 있던 회사 근처의 시장골목 포장마차였습니다. 항상 즐겨 먹던 메뉴는 연탄불에 미리 초벌로 구워놓은 것을 주문을 할 때마다 한 번 더 구워서 내주는 닭발과 산낙지 한 접시였지요.

오늘 따라 아내는 그 시절의 추억이 그리웠는지 닭발이 먹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왔고, 전 눈치도 없이 순대국이라는 답문을 보내게 된 겁니다. 그런 아내의 마음을 미리 알았더라면 저도 산낙지를 선택했을 텐데 너무 늦게 깨닫게 되었지요. 뒷북 치는 셈 치고 이제라도 산낙지로 메뉴를 바꾸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은 고민도 잠깐 해보았습니다.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이 지난 금요일부터 일주일간 휴원을 하는 탓에 지금은 본가에 맡겨진 상태인지라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바깥에서 자리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선택하기 위해 아직 퇴근시간이 되지 않은 아내의 휴대폰으로 통화를 시도해 봅니다. 곧바로 고무공 만큼 탄력있게 튀어 오르는 아내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옵니다.

"네. 어디세요?"
"응. 어떻게 해? 바깥에서 먹을 거야? 아님, 집에 먼저 들어가 있을까?"
"추운데 그냥 집에 들어가 계세요. 닭발이랑 순대국은 제가 가지고 갈께요"
"오케이. 그럼 좀 있다 봐."

그래도 반주 한잔은 해야 할 것 같아 근처 마트에서 소주를 사들고 집에 들어서서 보일러부터 확인합니다. 조그만 밥상 위에다 어머니께서 담궈주신 총각김치와 두 벌의 수저, 2개의 소주 컵, 1개의 음료수 잔을 올려놓고 술상 준비를 마칩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초인종 소리와 함께 양손에 검고 흰 비닐봉투를 하나 씩 나눠 든 아내가 추운 입김을 앞세우며 들어옵니다. 곧바로 논스톱의 조촐한 술자리가 시작되려는 순간입니다.

"산낙지 생각도 났겠네?"
"어? 어떻게 알았죠?"
"이궁...... 그래도 13년이나 한이불 덮고 살았는데 그걸 모르겠어?"
"하하...... 그러네요."

사실 아내가 가지고 온 비닐봉투에는 포장해 온 순대국과 아이들을 위한 떠먹는 요구르트만 담겨 있을 뿐입니다. 사연을 물어보니 집까지 배달이 된다는 말만 믿고 순대국을 포장해 나오면서 전화로 주문을 하려 했던 모양입니다. 그렇잖아도 집으로 오는 길에 있는 횟집에서는 산낙지 한마리 가져갈까 하는 고민도 했었다고 하는군요.

허나 손에는 순대국을 들고 있고, 닭발은 전화로 주문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산낙지는 다음에 맛있게 먹을 요량으로 그냥 횟집을 지나치게 된 것이죠. 그렇게 한참을 걸어오다가 시간이 얼추 맞겠다 싶어 닭발집에 주문전화를 넣었더니 주소를 확인하고 나서야 우리가 사는 아파트까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배달이 안된다고 하더랍니다. 이미 한참이나 지나쳐 온 길을 다시 돌아가서 산낙지를 산다는 것도 이미 약이 오른 아내의 입장에서는 선뜻 내키지 않았겠지요.

그래도 욕실에서 간단히 씻고 나온 아내는 속이 많이 상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김치를 썰어넣은 칼국수를 끓이면서 밝은 웃음을 짓습니다. 그리고 입으로는 연신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 하더군요. 결국 아내에게 있어 오늘이라는 시간은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매콤한 닭발도, 꿈틀꿈틀 산낙지도 그 어느 것 하나 함께 할 인연이 없는 날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순대국에 반주를 한잔 맛있게 넘기고 나서 아내의 손에도 술잔을 내밀고 쪼르륵 한 잔 따라주니 술잔을 받아든 아내의 얼굴이 무척이나 좋아 보인다는 겁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혹시라도 미안해 할 남편을 위해 밝은 얼굴을 하고, 괜찮다는 말로써 립서비스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아내를 위해 뭐라도 한마디 해야겠기에 "내일이라도 닭발 먹을 거야?"하고 물어봅니다.

"그럼요. 내일 정말 먹게 해줄 거예요?"
"그래? 그럼 내일은 내가 시장에 들렀다 오면서 꼭 사가지고 올께."

흡족한 말을 듣게 된 까닭인지 김치칼국수를 안주 삼아 한잔의 술을 들이키고 있는 아내의 얼굴에 뭔지 모를 아련함이 반짝 빛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건 추억의 한 조각일 수도 있겠거니와 지금까지 가슴 한켠에 간직해 오던 그리움의 편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닭발과 산낙지에 대한 미련을 말끔히 날려버린 듯한 아내의 그런 얼굴을 볼 수 있는 오늘이 너무나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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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