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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살아 보니 이렇게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거늘 진득하게 예정일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채 준비가 되지 않은 엄마의 자궁을 스스로 열고 나온 값을 인큐베이터와 호흡기로 톡톡히 치러야만 했던 내 사랑하는 큰딸아.

그리고 엄마의 뱃속 너무 낮은 곳에 자리를 잡은 채 생명의 끈을 이어가는 네가 불안하여 끝내는 유명한 의사선생님을 통해 묶는 수술까지 하고서야 겨우 세상에 태어난 작은딸아.

오늘은 그냥 아빠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으련?

14개월 터울의 너희가 태어난 날은 모두 똑같이 순백의 눈이 세상을 뒤덮었던 날이었어. 너무나 작고 약해서 아기처럼 보이지 않았던 언니가 탄생의 울음소리를 터뜨렸을 때 내렸던 그 때의 눈이나 하루하루를 살얼음 걷는 심정으로 기다렸던 동생이 태어났을 때 내렸던 그 때의 눈이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이나 닮아 있었던 것 같구나.


오늘은 언니가 유치원 졸업식을 하루 앞둔 날이지. 사나흘을 계속 빗줄기만 내려주던 하늘이 오늘은 웬일로 하얗고 소담스런 함박눈을 내려주셨어. 그것을 본 너희는 아파트 현관을 나서면서부터 "와~"하는 탄성과 함께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며 좋아했지. 그리고 우리 셋은 나란히 우산을 받쳐 쓰고 쌓인 눈을 밟아가며 유치원이 있는 학교까지 걸어갔어.


교문에 들어섰을 때 그 넓은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었지. 그저 누군가가 남겼을 발자국만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을 뿐이었어.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를 한 너희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예쁜 놀이터가 있는 유치원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지. 눈은 꽃처럼 뿌려졌고, 너희가 밟고 지나가는 눈밭 위로는 네줄기의 앙증맞은 작은 발자욱들만 새롭게 생겨났지.

오늘 그 눈이 내리는 운동장을 걸어가는 너희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아빠는 몇 해 전에 너희가 태어났던 날에 축복처럼 얼굴과 가슴으로 맞이했던 그 때의 흰눈이 갑자기 생각났던 거야. 정말이지 감동이었고, 행복이었지. 또 한편으로는 부담이기도 했던 설명하기 힘든 감상이 밀려 왔단다. 그래서인지 지금이라는 시간에 이렇게 편지라도 쓰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구나.

고맙다. 아빠의 딸로 태어나 줘서 고맙고, 인큐베어터 안에서 손과 발에 자극을 줘야만 호흡을 하면서도 생명의 끈을 쉽게 놓지 않아줘서 고맙고, 불편했던 엄마의 뱃속에서 묶여있는 시간동안 용케 버텨줘서 고맙고,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맙고, 초등학교 학부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너무나 고맙다.

큰딸아.

성장이 조금 더뎠기에 취학을 해야 할 나이임에도 유치원을 1년 더 다니고 난 지금에서야 입학하게 되었지만 앞으로 네가 열어갈 미래를 생각하면 이건 크게 나아가기 위해 잠시 늦추게 된 것뿐이니 마음 쓸 일은 아니란다. 이제 다음 달에 입학을 하게 되면 작년에 함께 생활했던 친구들은 한학년이 빠른 언니가 되어 있겠지만 아빠는 큰딸이라면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어. 그리고 네가 항상 나서서 챙겨주는 동생이잖니? 사랑하고 배려하는 그 마음, 언제까지 이어가 주길 아빠는 진심으로 바란단다.

작은딸아.

언니보다 키는 작지만 힘도 세고 체중도 더 나가는 네게 가끔 아빠는 미안했단다. 아빠는 언니가 너무 여리고 약해서 언니한테 좀 더 마음을 썼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누구를 더 사랑하거나 귀하다는 말은 아니란다. 똑같은 아빠의 딸인데도 언니에게 마음이 더 쓰이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는 거야. 지금은 네가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겠지만 아빠가 작은딸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 믿고 지금처럼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주렴. 그리고 네가 매일 놀리고 괴롭히면서도 항상 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위해주려하는 네 마음 잘 알고 있단다. 그러니 지금의 그 마음으로 언니와 언제까지나 돈독한 우애를 나눴으면 좋겠어.

치~ 아빠가 오늘은 오랜만에 눈을 보더니 닭살 돋는 센티멘털리즘에 빠져든 것 같구나. 사랑하는 우리 두 딸. 너희가 원할 때면 아빠는 언제든 한 손을 내어 너희를 거들 것이고, 그것이 부족하다면 두 손을 모두 내어 너희에게 줄 거란다. 대신 지금까지는 가끔 쓴소리와 함께 꾸짖는 것에 멈췄었지만 앞으로 아빠한테 큰 실망을 안겨줄 경우에는 처음으로 매를 들게 되는 날도 있겠다 싶어. 그러니 지금처럼 거짓말 안하기와 나쁜 행동 안하기 만큼은 꼭 지켜주길 바래. 아빠도 지금보다 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께.

자! 그럼, 다가오는 설날에는 떡국 한그릇씩 먹고 지금보다 훨씬 예쁘고 건강해주겠다고 약속해 줄래?
빨리 손 내밀어 봐. 약속하고, 도장 찍고, 복사까지 다 했다. 알겠지?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