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 껍질 속의 사랑 [V2. 002]
불탄의 開接禮/땅콩껍질 속의 사랑 : 2010. 4. 24.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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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요즘 날씨다.
가끔은 하늘에 먹장구름이 걸리면서 바람에 물기를 담아오지만 시원스럽게 쏟아지지는 않고, 낮 동안에는 그렇게 불볕더위를 내뿜으면서도 해가 넘어간 어스름 녘에서 여명이 트는 새벽까지는 추기(秋氣)마저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보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다. 애타게 무엇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어떤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건만 그렇게 걸음을 멈춰 우러른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멍하게 있을 때가 많아졌다.
가을은 남자의 가슴으로부터 먼저 오려는가? 샤워를 하고 난 뒤 코로 휘감기는 스킨로션처럼 강하게는 아니지만 논둑에서 볏짚으로 구워내던 콩깍지만큼이나 아련하게 추억으로 오려는가? 여전히 몸뚱이는 한여름에 놓였건만 심장은 연어처럼 가을로 향하는가? 알뜰하게 먹고서야 쟁반 위에 올려놓은 사과 꽁다리에는 날벌레가 어지럽고, 모기에 물린 팔꿈치는 가려움을 호소한다.
답답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릴까 싶어 베란다 문을 여니 어두운 바람 한줌이 숨으로 마셔진다. 아직은 이른 시간인지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데 건물에서 내보내는 불빛과 십자가만 눈앞에 가득하다.
이런 날에는 사랑이 그립다. 커피가 생각나는 것은 맛보다는 향 때문이다. 사랑이 그립다는 것은 지금 내게 사랑이 없어서 간절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가슴 떨림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때의 정취를 맡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이 힘들어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힘들었던 그때의 열정을 다시 갖고 싶기 때문이다. 첫사랑이 서글픈 건 이루지 못해서가 아니고, 까마아득히 잊혀지기 때문도 아니다. 스스로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소중했다고 느꼈던 그 시간들을, 추억들을 잊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에 서글픈 것이다.
세월이 흘러간다. 마음의 여유를 찾기 보다는 생활의 여유를 생각하는 일상이 사랑을 잊게 한다. 함께 하면 좋았던 마음을 잊게 하고, 같은 곳을 보던 시선을 돌리게 하고, 같은 것을 얘기하던 입술을 닫게 한다. 재미는 없어지고 한숨이 늘어난다. 희망은 작아지고 푸념은 커져간다. 미래에 대한 꿈은 사라지고 잠속의 꿈은 시리즈로 남는다. 소설을 봐도 느낌이 없고, 영화를 봐도 자극적인 장면만 기억난다. 얼마 전에 개봉했던 쌍화점이라는 영화를 보고 온 관객이 자신의 블로그에 남자배우의 엉덩이밖에 생각나지 않는다는 감상평처럼.
그렇다고 내가 측은하다거나 안쓰럽다는 것은 아니다. 고쟁이 속에서 꼬깃꼬깃 지전을 꺼내 주시던 외할머니의 얼굴에도 삶의 흔적을 주름으로 보이셨지만 언제나 막걸리 한 사발이라도 들이키시고 나면 노랫가락에 어깨춤을 실으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들려주신 말씀이 당신께서는 너무나 좋은 세월을 살아와서 여한이 없다고 하시면서 너무나 맑은 웃음을 보여주셨다. 누구나 자신에게는 남들보다 특별한 인생이 기다릴 것 같지만 별반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스스로 후회도 남고 미련도 있을 테지만 외할머니의 말씀처럼 어느 정도 체념하고, 어느 정도 포기하면 그래도 살아 갈만한 것이 인생일거다.
그렇게 나도 살아가게 마련이다. 가끔은 한여름 땡볕에 때 이른 가을을 타는 계절병도 겪으면서, 미련처럼 한구석에 남아있는 삼류소설을 그리면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시 감았던 눈을 뜨면 어김없이 펼쳐지는 생활의 무게감을 느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거다. 억지로 만드는 상상 속을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높은 곳을 보면 내가 한없이 낮아 보이지만 밑을 의식하면 잠시나마 다행이란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가 둘씩이나 있고, 그 아이들에게 외풍을 막아줘야 할 책임이 너무나 크고도 큰데 마음은 현실을 따르지 못한다면 어찌 하려느냐.
낮 동안 치쳐서인지 매미소리도 들리지 않는 시간, 선풍기를 밀어낸 자리에 모기향을 피워놓고, 여전히 가려움이 없어지지 않는 팔꿈치에 모기약을 발라본다. 엎드려 자는 잠버릇 탓인지 옆구리가 아팠다던 큰아이를 바로 눕히고, 맨바닥까지 굴러간 작은 아이를 요 위에 다시 뉘우니 잠자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아이를 보면서 편해진 탓인지 하품과 함께 졸음이 밀려온다.
PS. 본 포스트는 2009년 8월 4일, 알라딘과 네이버블로그에 송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