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추억의 버스안내양을 볼 수 있다
불탄의 샵과 플랫/살며 생각하며 : 2010. 4. 2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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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그러니까 중학교 3학년 여름무렵 쯤 불탄의 가족은 서울 상도동에서 양천구 신정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어요. 아주 넓다란 놀이터가 바로 앞에 있어 더욱 근사하게 느껴졌던 2층 독립주택이었지요. 얼마간 생활을 하다가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보고 배정받은 학교는 영등포고등학교.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던지라 많은 에피소드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추억도 많이 남아있어요. 당시 난곡을 기점으로 하는 버스 111번의 종점이 불탄의 집이 있는 신정동이었는데 노량진을 경유하기 때문에 등·하교시에는 이 버스를 주로 이용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종점 한 정거장 바로 앞에 있던 학교가 바로 지금은 영상고등학교로 바뀐 영등포여자상업고등학교. 영등포여상은 야간반도 운영하고 있는데 불탄의 하교시간과 영등포여상 야간반 학생들의 등교시간이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밝은 자주색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거의 점령하고 있는 버스를 비집고 올라타야 했지요.
무리를 짓고 있으면 용감한 것이 사람이고, 호기심 가득한 나이이니 만큼 짓궂은 장난도 걸어왔던 것 같습니다. 수줍음이 많았던 불탄은 거의 쌩으로 시달림을 받았고요. ㅡ.,ㅡ
어찌되었건, 학생들은 나중에는 학생용 토큰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회수권을 가지고 다녔는데 가끔 회수권이 주머니에나 수첩에 없을 때는 난감하기도 했어요. 버스요금이 후불이었던 시기였으니 내릴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차비를 준비했었으니까요.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여학생들 중 어느 한명에게 회수권 한장만 빌려달라는 얘기를 할 수 있을 법도 한데 그런 용기를 내지도 못했죠. 그때는 회수권 빌려달라는 멘트도 작업용으로 줄창 이용했던 레퍼토리 중의 하나로 인식했을 때였으니......
종점에 들어가서도 귀까지 빨개지며 어쩔 줄 몰라하면 매번 보던 학생이라 그랬는지 천사처럼 들리는 목소리도 가끔은 듣게 됩니다. 융통성이 없었는지 왜 현금으로 낼 생각은 끝까지 하지 못했는지 지금도 이상하지만 말예요.
"학생, 다음부턴 회수권 준비하고 타야 되요. 어서 가요. 배고프겠네."
"네. 누나. 내일 누나 보면 오늘 거 까지 드릴께요."
만원버스. 버스가 정차하거나 출발할 때 문을 여닫는 속도를 최대한 빨리해야 하고, 요금 계산을 정확히 해야 하고, 승객들을 위해 다음에 정차하는 곳을 소리쳐 알려줘야 하고, 운전기사에게 출발이나 정차에 대한 안내를 문짝을 두드리며 알려줘야 하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 주변에서는 버스 안내양이 없어지게 되었지요. 버스 요금도 선불제로 바꾸었고, 출입문도 앞쪽에 하나 더 만들어 승차하는 시점에 버스기사 옆에 매달아 놓은 토큰함에 요금을 계산했으며, 좌석이 있는 곳곳에 부저를 달아놓게 되었죠.
일부 시외버스가 다니는 구간에서는 아마 1985~6년도까지 버스안내양이 있었을 거예요. 대학입학 학력고사 340점 만점에 무려 20점을 차지하고 있던 체력장 시험을 보았던 날이었으니 1985년도가 맞을 거예요. 시험을 끝내고 친구들과 교외선을 타고 백마역으로 술(응?)을 마시러 갔다가 기차가 끊기는 바람에 물어물어 백마역과 서울역을 운행하는 시외구간 버스를 이용했었는데 그때 불탄의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버스안내양을 보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네요.
이젠 추억속에서만 회상할 수 있었던 버스안내양을 2010년에 들어서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무엇보다 옛날의 향수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는 환영할 일이겠지요.
버스안내양을 운영하기로 한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그 의미와 이유를 각기 달리하고 있는데요. 충남 태안의 경우에는 관광명를 만들기 위해 관광 가이드와 같은 의미를 부여했어요. 충남 보령의 경우에는 관광목적과 함께 새터민과 같이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부활을 시켰다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예요.
대전시의 경우는 조금 특이합니다. 운전기사에 대한 친절서비스 교육의 일환인 셈이지요. 버스안내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고운 도우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말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1980년대 초반까지는 의무적으로 운영이 되다가 점점 사라져버린 버스안내양이 2010년에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니 반가운 일입니다. ^^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던지라 많은 에피소드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추억도 많이 남아있어요. 당시 난곡을 기점으로 하는 버스 111번의 종점이 불탄의 집이 있는 신정동이었는데 노량진을 경유하기 때문에 등·하교시에는 이 버스를 주로 이용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종점 한 정거장 바로 앞에 있던 학교가 바로 지금은 영상고등학교로 바뀐 영등포여자상업고등학교. 영등포여상은 야간반도 운영하고 있는데 불탄의 하교시간과 영등포여상 야간반 학생들의 등교시간이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밝은 자주색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거의 점령하고 있는 버스를 비집고 올라타야 했지요.
무리를 짓고 있으면 용감한 것이 사람이고, 호기심 가득한 나이이니 만큼 짓궂은 장난도 걸어왔던 것 같습니다. 수줍음이 많았던 불탄은 거의 쌩으로 시달림을 받았고요. ㅡ.,ㅡ
어찌되었건, 학생들은 나중에는 학생용 토큰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회수권을 가지고 다녔는데 가끔 회수권이 주머니에나 수첩에 없을 때는 난감하기도 했어요. 버스요금이 후불이었던 시기였으니 내릴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차비를 준비했었으니까요.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여학생들 중 어느 한명에게 회수권 한장만 빌려달라는 얘기를 할 수 있을 법도 한데 그런 용기를 내지도 못했죠. 그때는 회수권 빌려달라는 멘트도 작업용으로 줄창 이용했던 레퍼토리 중의 하나로 인식했을 때였으니......
종점에 들어가서도 귀까지 빨개지며 어쩔 줄 몰라하면 매번 보던 학생이라 그랬는지 천사처럼 들리는 목소리도 가끔은 듣게 됩니다. 융통성이 없었는지 왜 현금으로 낼 생각은 끝까지 하지 못했는지 지금도 이상하지만 말예요.
"학생, 다음부턴 회수권 준비하고 타야 되요. 어서 가요. 배고프겠네."
"네. 누나. 내일 누나 보면 오늘 거 까지 드릴께요."
만원버스. 버스가 정차하거나 출발할 때 문을 여닫는 속도를 최대한 빨리해야 하고, 요금 계산을 정확히 해야 하고, 승객들을 위해 다음에 정차하는 곳을 소리쳐 알려줘야 하고, 운전기사에게 출발이나 정차에 대한 안내를 문짝을 두드리며 알려줘야 하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 주변에서는 버스 안내양이 없어지게 되었지요. 버스 요금도 선불제로 바꾸었고, 출입문도 앞쪽에 하나 더 만들어 승차하는 시점에 버스기사 옆에 매달아 놓은 토큰함에 요금을 계산했으며, 좌석이 있는 곳곳에 부저를 달아놓게 되었죠.
일부 시외버스가 다니는 구간에서는 아마 1985~6년도까지 버스안내양이 있었을 거예요. 대학입학 학력고사 340점 만점에 무려 20점을 차지하고 있던 체력장 시험을 보았던 날이었으니 1985년도가 맞을 거예요. 시험을 끝내고 친구들과 교외선을 타고 백마역으로 술(응?)을 마시러 갔다가 기차가 끊기는 바람에 물어물어 백마역과 서울역을 운행하는 시외구간 버스를 이용했었는데 그때 불탄의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버스안내양을 보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네요.
이젠 추억속에서만 회상할 수 있었던 버스안내양을 2010년에 들어서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무엇보다 옛날의 향수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는 환영할 일이겠지요.
연합뉴스 - 태안에서 볼 수 있는 버스안내양
일간스포츠 - 보령에서 볼 수 있는 버스안내양
대전시에서 한시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버스도우미
버스안내양을 운영하기로 한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그 의미와 이유를 각기 달리하고 있는데요. 충남 태안의 경우에는 관광명를 만들기 위해 관광 가이드와 같은 의미를 부여했어요. 충남 보령의 경우에는 관광목적과 함께 새터민과 같이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부활을 시켰다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예요.
대전시의 경우는 조금 특이합니다. 운전기사에 대한 친절서비스 교육의 일환인 셈이지요. 버스안내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고운 도우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말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1980년대 초반까지는 의무적으로 운영이 되다가 점점 사라져버린 버스안내양이 2010년에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니 반가운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