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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폭발해 버렸다. 무더운 날씨에 가슴에는 불을 담고 머릿속엔 타들어간 영혼의 재가 가득했을 터인데 내 무신경이 도화선이 되어 아내의 시한폭탄을 건드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거실과 주방으로 이어지는 긴 공간에는 얼마나 폭발의 강도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알 수 있는 파편들이 곳곳에 확연히 새겨져 있었다.

아내는 저녁을 먹지 않고 기다리는 내게 상차림을 해주기 귀찮았는지, 아니면 오랜만에 오붓한 술자리를 가지면서 투정을 좀 부리려 했는지 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사창사거리 근처로 나오라는 문자를 보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심한 잘못을 했던 터라 요즘 들어서는 꼬투리 잡힐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는데 잠시 딴 짓 하느라 약속된 시간을 넘기고 말았고 서둘러 휴대폰으로 위치 파악에 들어갔지만 돌아오는 것은 북풍한설보다도 더 냉랭하고 짧은 “됐어요.”라는 말뿐이었다.

짧은 통화에 불안해하는 순간 초인종 소리가 길게 들려왔고 서둘러 현관문을 여니 아내는 심하게 불규칙한 숨소리를 내면서 밀치듯 들어오더니 손에 들고 있던 복숭아 상자와 황금키위 2팩을 주방 쪽을 향해 세차게 던져 버렸다. 단순히 술 한 잔 같이 하고 싶었던 것만은 아니었음을 빠른 회전력을 가지고 있는 내 머리는 즉시 알아챌 수 있었지만 이미 폭풍의 강도는 내가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게 커져있었고, 그 영향권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반경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이렇게 짐이 있었으면 미리 말을 하지. 이 더운 날씨에 왜 혼자 끙끙대면서 열 받아 하는 거야?”

차라리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속사포와 같은 아내의 항변이 울음을 동반하면서 비수처럼 꽂혀 들어왔다.

“너. 뭐니? 내가 요즘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알기나 해? 내가 더 어떻게 해야 되는 거니? 아주 돌아버리겠어. 정말”

어? 이건 아주 막나가자는 식의 반말과 억지가 내포되어 있는 무차별적 공격성 발언이었다. 뭐라 달래 줄 수 있는 말을 생각해 내기도 전에 그야말로 쉴 새 없이 쳐들어오는 울음 섞인 날카로운 언어들은 말로써의 기능을 상실한 채 가슴을 헤집는 흉기로 맞서 왔다.

잠시 폭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어떻게 복구 작업을 벌여야 할지 고민을 하고나서 아내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세수나 빨리 하고 나오라는 말을 건넸다. 그런 내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게 들렸는지 아내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한 쪽 벽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왜? 내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마음이 풀리겠어? 그러지 말자. 배도 고프고 하니까 지금이라도 가까운데 가서 오붓하니 술 한 잔 하자. 내가 잘못했어.”

어색한 웃음과 비굴한 표정을 섞어가며 달래기 시작하자 그래도 아주 효과가 없지는 않았는지 별 말 없이 욕실에 들어갔다 나온 아내는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다시 한 번 토닥거리면서 모기향의 위치도 다시 정하고, 선풍기 바람도 위쪽으로 가게 회전으로 맞춰 놓고는 간편한 옷으로 꺼내 입었다. 아이들이 혹시라도 잠결에 아빠, 엄마를 찾을 것을 대비해 거실 전등은 켜놓은 채 아이들 머리맡에는 아내의 휴대폰까지 놓아두었다. 5층 계단에서 앞 뒤로 내려가는데 층계참마다 센서를 통해 작동하는 전등이 켜질 때마다 웅크리고 있던 어둠이 진저리를 치며 도망치는 모습이 꼭 내 형상을 닮아있었다.

“B형은 꼭 한 번씩 돌아버린다는데 왜 우리 식구들은 모두 B형인 거야”

애꿎은 혈액형을 탓하는 아내의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밤거리로 나오니 조금 전까지 전쟁을 치른 마음에 아슬아슬한 평화가 찾아왔다. 어찌 되었건 후폭풍이 일기 전에 상황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는 안도감은 자연스럽게 콧소리를 내면서 뭔지도 모르는 노래를 흥얼거리게 만들었다.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생선회와 볶음류, 그리고 탕류를 혼합시킨 메뉴를 내놓는 퓨전주점을 찾아 들어가 마광연이라는 안주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주문하는데 아내가 무슨 안주냐고 물어왔다.


“응? 참치, 광어, 연어회와 막회무침이 함께 나오는 거라는데?”
“그럼 참광연이라고 해야지 왜 마광연이이야? 웃기네.”
“아마 참치회를 일본말로는 마구론가 뭔가로 부르니까 그런 게 아닐까?”
“아. 그렇겠구나”

많이 풀어진 모양이었다. 나누는 대화 속에는 여지껏 불편하게 했던 가시가 많이 무뎌져 있었고, 내심 그런 상태에 안도를 하고 있을 때 메인 안주보다 먼저 소라와 옥수수, 미역국이 테이블 위에 깔리기 시작했다. 서로의 잔에 넘치지 않을 만큼의 소주를 따르고 난 뒤 소라를 하나 쪽 빨아 먹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거 옛날에 학교 앞에서 번데기랑 함께 많이 사먹었었는데. 왜 신문지 같은 걸 고깔 모양으로 접어 거기에 국자로 하나씩 떠 담아 팔았잖아.”

하굣길 학교 앞에는 설탕으로 만든 거대한 배 모양이나 칼 모양을 뽑기 위해 모여든 아이들에게 둘러쌓인 리어카가 있었고, 그 옆에서는 목에 수건을 두른 아저씨가 번데기와 소라를 팔고 있었다. 또 한쪽에는 귀여운 병아리를 사과상자 같은 곳에 두고 어린 학생들을 유혹하는 아줌마도 있었고, 호주머니 속에서 짤랑거리는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멈추는 수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잠시 빠져들었던 옛 생각에서 깨어나게 된 것은 조명 탓인지 술기운 탓인지 제법 얼굴이 발그스레한 아내가 턱을 괸 채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가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다.

“오빠, 나 힘들게 하지 마. 지금보다 더 노력하고 애써 볼게. 그러니까 오빠도 나 좀 봐주라.”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이 아려왔다. 내가 해야 할 말을 먼저 해준 아내가 고마웠고, 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내가 어렵게 꺼낸 화해의 말을 말없이 묵묵하게 받아준 아내에게 미안했다. 먼저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러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이 남은 지금, 서로의 마음이 이번 일을 계기로 많이 열리게 되었으니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 되고, 내일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이 되겠지. 잠자고 있을 아이들에 대한 생각을 하며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이미 가을이 깔려 있었다.

PS.   본 포스트는 2009년 8월 17일, 알라딘과 네이버블로그에 송고한 글입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