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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아파트는 거실을 넓게 쓰기 위해서였는지 전에 살던 입주자가 베란다와 거실 사이의 공간을 없애버렸다. 그 개조공사 덕분에 거실을 넓게 쓰는 것은 좋았지만 실내와 바깥이 달랑 유리문 하나로 나뉘기 때문에 방음이나 방한, 방서에는 아무래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이 아파트로 이사를 오고 난 이후부터 거실에서 잠을 자는 우리 가족들은 비오는 날 아침이면 모두 일찍 눈을 뜨게 된다.

오늘도 잠결에 들리는 빗줄기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창문으로 들이치는 빗소리가 얼마나 가까이 들렸던지 꿈속에서부터 들었을 것 같은 기분에 고막이 울려 온다.

혹시라도 밖에서 보일까 싶어 잠을 자는 시간에만 가려놓는 홑겹의 커튼을 걷어내니 시원스런 장대비를 우산으로 받치면서 바쁘게 오가는 행인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잠이 덜 깬 눈에도 바닥에 떨어졌다가 다시 튀어 오르는 빗방울이 행인들의 발걸음에 하나씩 밟혀가는 광경이 그대로 들어왔다.

아이가 아프면 가족 모두는 저마다의 일손이 잡히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것도 이틀째 밤만 되면 열을 올리는 작은아이에게 해열제를 먹이며 한숨이라도 더 자게 하려니 잠도 설칠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 작은아이의 증세가 요즘 유행하는 신종 플루와 비슷한 것처럼도 보이니 불안함이 극을 향해 치닫는다.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건지 가늠을 할 수 없어 애만 태우는 것이니 모두가 서둘러야 할 아침은 점점 더 엉망이 되어간다.



“어떻게 해요?”

“뭘? 애들 데리고 병원에 가봐야 할 거 아냐?”
“병원에 데리고 갔다가 괜히 없던 병만 만들까봐 그러죠. 갈려면 보건소가 낫잖아요.”
“이렇게 일찍 열지 않을 거 아냐?”
“그러니까요.”


사창사거리에 소재하고 있는 코아이비인후과. 우리 두딸이 이젠 가족이 되다시피한 병원이죠. ㅡ.,ㅡ


결국 병원은 오늘까지 지켜보고 나서 결정하기로 하고 유치원에는 두 아이 모두 보내지 않기로 했다. 요즘 병원에는 신종 플루와 관련하여 환자들이 미어터진다고 하니 그나마 없던 병도 옮아올 것 같기도 하고, 유치원 역시 고만고만한 아이들과 어울리는 곳이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에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벌써 휴교다 뭐다 하면서 난리를 치고 있는 상황인데 우리 아이들은 방학 기간 중임에도 불구하고 아빠 엄마의 편의를 위해 유치원을 다니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게 미안해해야 할 일이다.


“에이. 내가 애들 보고 있을게. 너도 오늘은 일찍 와라.”

“그래도 되요? 어머니께 부탁할까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애가 갑자기 또 열이라도 오르면 노인네가 어떻게 하겠어?”
“그렇긴 하죠.”
“그러니까 내가 애들 데리고 있겠다고. 니가 데리고 있지 못할 거 아냐?”


다소 감정이 섞인 내 말에 아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인다. 결국 오늘은 내가 아이들과 함께 있어주기로 했다. 아내한테도 반나절만 근무하고 오후 4시경에는 귀가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혹시라도 열이 다시 오르거나 감기 증세가 심해지면 병원으로 달려갈 태세를 갖추고 조심스럽게 아이들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이들은 유치원에서의 시간을 적절히 적용해가면서 스스로 공부를 하기도 하고, 놀이 활동시간도 갖는다. 물감으로 그림도 그리고 서로의 배역을 정해놓고 실제와 비슷한 상황을 만들면서 역할놀이도 한다. 가끔 간식을 찾기도 하고, 스스로 냉장고를 열어 물이나 요구르트를 꺼내 먹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잠시라도 아빠가 보이지 않으면 화장실까지 따라다니면서 참견을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컴퓨터를 통해 뭔가를 해보려 해도 어느새 아이들의 차지가 되어버려 나는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를 함께 따라 부르거나 포털에서 제공하는 옷 입히기 게임에 함께 하면서 예쁜 옷을 고르기도 했다.

잠시 동안의 시간을 아이들에게 허락받고 옥상과 현관 사이에 있는 층계참으로 다가가 담배를 하나 피워 문다. 창밖으로 시선을 두니 그렇게 세차게 내리던 비는 어느 사이엔가 이미 그쳐 있다. 말끔하게 갠 날씨와 함께 작은아이의 아픈 증세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안도감이 깊게 내쉰 담배 연기에도 묻어 나온다.

얼마나 다행인가? 온통 마음을 어지럽히던 걱정거리가 일거에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는 그 안락감은 또 얼마나 큰 것인가? 생각을 깨우는 목소리가 뒤에서부터 내게 전해온다.


“아빠. 또 담배 펴요?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응?”


더 이상 어린아이가 하는 일상적인 물음이 아니었기에 흠칫 놀라 돌아서니 큰아이가 눈빛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왜 나왔어? 어여 들어가.”

“나 아빠랑 놀고 싶은데. 아빠는 맨날 담배만 피고...”
“응. 알았어. 아빠 이제 담배 그만 피울게. 같이 들어가자.”
“정말이요? 약속하는 거다.”
“그래. 어여 들어가자.”


작은아이가 건네주는 휴대폰에 닭볶음탕 거리를 준비해서 온다는 아내의 문자 메시지가 찍혀 있다.


PS.   본 포스트는 2009년 8월 27일, 알라딘과 네이버블로그에 송고한 글입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