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미쳐 들어가는 속이야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지붕을 이불 삼아 함께 생활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가슴앓이를 찌개로 끓여내고, 자신의 속울음을 밥으로 찌어내는 아내의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내 눈에도 살포시 안개가 스며든다.

잠시 죽음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똑... 똑... 또로로... 똑... 똑... 또로로...’ 초봄부터 몇 번이나 손을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만든 욕조에 매달린 수도가 내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서로 입을 열어 무어라 말을 한다는 것이 어색한 분위기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다소 안정을 찾은 아내가 무덤덤한 행동과 초점 없는 시선으로 목소리에 힘을 싣는다. 벽에 베개를 세우고 반쯤 기대어 앉아있는 나를 애써 등지면서까지 컴퓨터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던 아내였다.


“오빠. 처음 금호에서 만났던 거 생각나?”
“.........”
“왜? 생각 안나?”
“응? 아냐. 생각나.”
“.........”

아내가 왜 그런 질문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질문을 하고 난 다음의 행동을 보면 어떤 답변을 듣고자 하는 것도, 어떤 기대하는 답변이 특별히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아내의 질문이라는 것이 죽어 들어가는 자가 내뱉는 마지막 유언이라도 되는 양 허허로움이 짙게 묻어나 보인다.

그런데도 난 무슨 이유로 옛 생각이 난다고 답한 것일까? 혹시 지금의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런 생각 없이 던진 말인가? 아니면 일단 무슨 말이고 해야 된다는 조급증이 만들어낸 개소리라도 되는 것인가? 그런 상태에서도 어찌되었건 내 머릿속은 1995년의 그 날을 향해 지금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아내가 듣던 듣지 않던 오로지 신경을 두지 않는 내 입술은 잠시 헛기침을 흘린 후 나직이 열리며 옛 추억을 영상처럼 읊어간다.

아내와 함께 어울리는 패거리들 중에는 유난히 눈에 띄는 여자들이 많았다. 모델급의 각선미를 가진 여직원도 있었고, 아기 같이 청순한 모습을 하고 있어 뭇 영업소장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여직원도 있었다. 참 이상한 것은 그 중 퀸카 중의 퀸카라 명성이 자자했던 여직원 하나가 항상 아내와 붙어 다니던 단짝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술을 한 잔 마신 김에 나는 퀸카 옆에 항상 붙어 다니던 아내에게 고백을 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1년의 필드영업과 1년 6개월의 관리자 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사회생활의 쓴맛과 단맛을 모두 맛본 내가 처음으로 한남동 오피스텔에다 수입오퍼상을 호기롭게 냈지만 곧바로 실패를 하게 되었고, 급기야 도망치다시피 해서 찾아들어간 회사에서 이제 막 교복을 벗은 여덟 살 연하의 어린 영계한테 대시를 하고 있으니 회사에서는 금방 소문과 함께 불편한 압박을 내게 가해오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나를 응원해줘도 시원찮을 동료들조차 삐딱한 시선만 줄 뿐 어느 누구도 내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래. 그래서 오빠가 내게 대교로 가라 그랬잖아?”
“그랬지. 많이 불편했으니까. 출근하면 모두가 수군거리는 거 같고, 회식자리에서도 함께 나란히 자리에 앉으면 지들끼리만 잔 돌리면서 알게 모르게 우리를 무시했잖아.”

묻기만 했을 뿐 내가 어떤 말을 하던지 듣지 않을 것 같았던 아내는 어느새 내가 하는 말에 현실을 버린 채 몰입하였고, 이미 눈동자가 갖고 있는 시선은 과거 속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영상처럼 느리게 부유하고 있다. 그렇게 특별히 반짝 빛나는 예지는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의지는 있어 보이는 아내의 그 눈이 지금 잠깐 현실로 돌아오더니 낮게 질문을 하고 있다.

“왜? 더 얘기하기 싫어?”
“응... 다 지난 얘기잖아.”
“그래. 다 지난 얘기지.”
“.........”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자리에 뉘이며 편한 자세를 취하자 컴퓨터 앞에 있던 아내의 손이 자판을 두드린다. 더 이상 닦달해봤자 소득이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한 것일까? 염세적이었던 내 웃음도 어제 오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걷혀지고 있는 것 같다. 화장실 때문인지 자리를 비운 아내가 있던 공간을 그동안 가려져 있던 모니터가 대신한다.

"내가 서툴러서 그래.
  말 한번 잘못해서 이상해졌어.
  왜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 되지?
  몰라... 왜 이렇게 됐

끝내 말을 맺지 못한 아내의 한숨이 그렇게 모니터에 걸려 있다.

그런 아내가 고맙다. 이렇게 올곧이 믿어주길 바라는 나를 향해 위태로운 인연을 끝내 부여잡으며 놓지 않으려 애쓰는 아내가 안쓰럽고 고맙다.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신의 능력이 있다면 몇 개월 후로 훌쩍 앞서가고 싶다.

하지만 그 또한 피하는 거겠지. 피하기만 한다면 해결책은 없는 거겠지. 그러니 오늘을 부딪쳐야 하는 거겠지. 오늘따라 누구의 손길도 타지 않을 껍질 안에서 둘이나 셋이서 오붓이 살아가는 땅콩의 모습이 무척이나 부러워진다.


PS.   본 포스트는 2009년 9월 1일, 알라딘과 네이버블로그에 송고한 글입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