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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너무나 맑다. 새로운 세상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 저리도 햇볕이 고우니 잠시 전까지는 정말이지 꿈속에서 한바탕 드잡이라도 한 것만 같다. 그나마 촉촉한 도로와 여전히 창문에 맺혀있는 물기, 그리고 톡톡거리며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만 아니라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본다.

불과 30분이 조금 더 지난 시간이었을까? 거대한 검은 기운이 쓰윽 밀리는 느낌이 들더니 만화에서 본 것과 같은 모습으로 엄청난 바람이 불었다. 우리가 돌풍이라 표현하는 것의 모습이 저러한 걸까? 꼭지를 틀어놓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진 빗줄기가 하늘에서 부어졌다. 쏟아진 것이 아니라 부어졌다는 표현이 정녕 맞을 것이다. 바닥을 차오른 바람은 뱅뱅 도는 바람개비처럼 사방 벽을 치면서 맹렬히 울부짖었다. 아파트 창문으로 바라보는 내 눈에는 잠시 오래 전에 보았던 트위스터라는 영화 속에서 토네이도를 찾아다니는 조와 빌의 모습까지 스쳐갔다.

그렇게 주먹크기의 우박이라도 쏟아지는 것처럼 아주 둔탁하고 공포스러운 소리를 내던 빗줄기는 5분 정도 이어지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막상 무섭게 쏟아지던 비가 그렇게 그치고 나니 뭔가 허전하고 공허한 느낌마저 밀려왔지만 왜 그러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 더 쏟아부어주길 바랬던 것일까? 그렇다면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일까? 뭔가 불만스러웠던 마음까지 씻겨나가는 카타르시스 비슷한 희열을 느껴보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영화 트위스터에서 조와 빌이 필사적으로 토네이도 중심에서 날려 보냈던 동그랗고 날개달린 그 계측기가 용도와 쓰임과는 무관하게 아름다워 보였던 기억이 새로워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뭔가를 저 비의 돌풍 속으로 날려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일상적인 것이 아닌 것을 보게 될 때 난 곧잘 흥분하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짜릿한 쾌감까지 느끼곤 한다. 그 이면에 숨어있는 불행을 현실의 생각 속으로 끄집어내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다. 불구경을 할 때가 그렇고, 싸움구경을 할 때가 그렇다. 못난 생각이고, 멍청한 방관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뜻 앞에서 행동하지 않는 것을 보면 ‘나도 참 속물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 속물근성이 오늘도 여지없이 펼쳐지려는 순간 머릿속이 새카맣게 타버리는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서늘하게 스쳐 지나간다. 아이들과 아내가 바로 조금 전에 집을 나선 것이다. 급히 휴대폰을 찾아 아내의 통화버튼을 누르니 아내와의 전화통화기록만 가득한 액정이 눈에 들어온다. 몇 번의 통화를 시도했음에도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바로 그 때, 초인종이 울리고 아이들을 할머니 댁에 맡기러 그 돌풍을 동반한 빗줄기가 퍼붓기 바로 전에 집을 나섰던 아내와 아이들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물에 빠진 형국으로 벌벌 떨기까지 하면서 내가 열어준 문을 통해 들어선다. 겁에 질린 얼굴을 보니 많이 놀랐나보다. 때늦은 걱정으로 계속 통화버튼을 누르고 있던 내 휴대폰을 잡고 있던 손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고, 나를 쳐다보는 아내의 눈에는 서운함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아차! 맞다. 우산을 들고 뛰어나갔어야 했다.’





이 썩을 놈의 뒤늦은 후회는 항상 뒷북을 치는 결과 밖에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몇 십번을 경험했으면서도 오늘 또다시 놓쳐버리고 만다. 무안한 마음에 샤워하기 적당한 물의 온도를 맞추려 보일러를 확인하고는 얼른 아이들 먼저 욕실로 몰아넣고 헛기침만 해댄다. 머리까지 올라갔던 눈초리가 다소 부드러워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감을 느끼며 아이들 방에서 속옷과 목욕타올을 꺼내 나온다.

햇볕이 따듯해 보인다. 아이들과 아내는 원래의 계획대로 또 다시 집을 나섰고, 조금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뭐가 그리 좋은지 저만치에서 장난을 치며 걷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으로 가져간다. 조금 전까지 말끔하던 거실에는 그들이 벗어놓은 속옷과 외출을 위해 입었던 물에 젖은 외출복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하늘은 자신의 더러움을 쏟아내는 비로 깨끗이 닦아냈지만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땅콩네 가족은 하늘이 쏟아낸 빗줄기만큼 어지러운 자국을 만들어 낸다.

이 세상이 얼마나 깨끗해졌을까? 그만큼 나도 깨끗해 진 것일까?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바람을 타고 투명하게 퍼져가고 있다.


PS.   본 포스트는 2009년 9월 12일, 알라딘과 네이버블로그에 송고한 글입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