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 껍질 속의 사랑 [V2. 010]
결혼을 하고 나면 연애기간 동안 환상처럼 품고 있었던 배우자에 대한 신비감이 한 꺼풀씩 벗겨지면서 현실적으로 눈앞에 존재하는 전혀 낯선 인격체에 심한 당혹감을 갖게 되나 보다. 작년에 벌써 결혼 10주년을 기념하여 가까운 온천 스파에 다녀왔으니 더 이상 어떤 기대감을 가질 수 있으랴마는 그래도 마음 한켠에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못해 무신경한 듯 보이는 아내의 모습에서 뭔지 모를 연민마저 가지게 된다. 허나 언제부터인지 일상에서의 대화까지도 서로의 의사를 주고받는 소통의 기능을 상실한 채 일방적 통보로서만 존재하게 되었으니 내일은 고사하고 당장 지금부터가 캄캄하다. 부부라는 존재는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것이다. 닦고 어루만지면 한없이 눈부신 광채를 쏟아내지만 조금만 어긋나면 파경으로 치닫게 되어 있다. 특히 가정 살림에 갑작스런 위기가 찾아오거나 신뢰에 조그마한 틈이 보이기라도 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특성이 있다. 그 위기감과 괴리감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 많은 부부들이 실제로 같은 취미를 갖고자 노력하고 있다. 나이에 따라 퍼터와 아이언을 들고 필드나 연습장에 나갈 수도 있을 것이고, 음료와 간식거리를 가볍게 담은 배낭을 메고 스틱을 챙겨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함께 갤러리나 공연장에서 자신들의 감상을 나눌 수도 있을 것이며, 맛난 곳만을 찾아다니며 식감을 채워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내와 취미인 양 함께 이 작업을 하고부터는 공통된 주제가 생겼기에 대화에 힘이 실린다. 쉽게 웃을 수 있게 되었고, 함께 고민할 일도 만들게 되었다. 특별한 날에나 가끔 있었던 노래방도 남 눈치 볼 필요를 느끼지 않고 새로 생긴 코인 노래방에서 기분 좋게 두세 곡 정도는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라도 비용을 지불해가며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취미를 가져야했건만 거꾸로 소득을 만들어내면서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인터넷이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을 많이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최근 직장에서 늦게 퇴근하는 아내가 귀가를 해서 하는 일이란 것이 자고 있는 아이들의 매무새를 고쳐주는 것과 혹여나 있을지 모를 싱크대 안의 설거지 거리를 훑어보고 나서 시원스럽게 샤워를 한 이후에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남편의 하는 양을 가끔 거드는 것을 제외하고는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다. 이런 생활은 한창 여름 무렵에 갑자기 엄습한 냉랭한 기운 때문에 시작되었는데 그 이후 말이나 문서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가급적이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평화협정 비슷한 결과로 표출되었으며, 지금까지 그 협정은 두 사람이 암묵한 가운데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내도 무척 답답해했다. 당장 밝아올 아침을 위해서라도 잠자리에 들어야 할 내가 늦은 시간까지 자기를 바라봐도 시원찮을 판에 컴퓨터와의 연애에 빠져있으니 스스로에게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던 어느 날, 업무용으로 컴퓨터를 사용하는 줄 알았던 남편에게서 뭔가 다른 느낌을 받게 된 아내는 호기심을 담은 눈으로 내가 하는 양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컴퓨터로 했던 작업의 결과가 일주일에 한번 꼴로 가계에 보탬이 되는 택배나 등기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자 자신도 동참하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린 우리 같은 부부에게는 이런 류의 생활은 어울릴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의 제약과 거리의 제약이 있을 수 있겠거니와 무엇보다 아이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힘들기 때문이다. 몇 주 전에는 우리 가족도 상당산성에 올라 청주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아이들에게 자그마한 호연지기를 심어주기도 했지만 다녀온 다음에 느꼈던 감상은 생각보다 가족 모두가 힘들어 하더라는 것이다. 어르고 달래는 시간만큼 받아들여지는 느낌은 반감되는 것도 있겠기에. 그래도 한 가지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인가 또 다시 산성에 가고 싶다는 의사가 아이들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산성의 그 시원한 바람을 등지고 자연을 느끼는 감상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산행을 마치고 들렀던 음식점에서의 즐거운 시간 때문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선택 아닌 선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로서는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매일같이 욕조를 닦고 변기를 닦을 수는 없다. 멀쩡한 세탁기를 분해하여 청소를 한다는 것도 바보스러운 일일 것이고, 데스크탑을 열어 쿨러의 먼지를 청소하고 파워서플라이를 점검하는 것도 어쩌다 한 번의 일인 것이다. 대신에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아이들이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면 지체 없이 달려 나갈 수 있는 어떤 일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가장 손쉬운 것이라 찾아낸 것이 이런 일일 수밖에.
이런 연유로 이제 아내도 블로그를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커뮤니티를 찾아 자신의 생활을 점검하기도 하고 댓글과 답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소통도 하고 있다. 리뷰사이트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찾아 체험단이나 리뷰어로 신청하기도 하고, 간단한 음식을 만들면서 찍은 사진을 기초로 포스팅을 하기도 한다. 거기에 더해서 요즘에는 책도 많이 읽으려 하는데 그 이유를 들어보니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1차적인 목적도 있지만 블로그 소재로도 아주 적합하기 때문에 읽는 거란다. 아내가 읽고 있는 책들이 대부분 육아나 가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예전에 판타지에 몰입했을 때보다는 마음이 놓인다. 실제로 그 때보다 아내는 훨씬 더 생활에 있어서도 안정적이고 아이들이나 가족들을 대하는 행동에 있어서도 부드러워졌다.
아내가 사이버 공간에 만들어 놓은 방에 가만히 노크도 없이 방문하고 있는 지금. 가벼운 웃음과 함께 그곳에 아내가 심어놓은 글들만큼이나 곱게 나 역시 핑크빛 행복을 느끼게 된다.
PS. 본 포스트는 2009년 9월 17일, 알라딘과 네이버블로그에 송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