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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린아빠, 예린아빠"
"으... 응..."
"좀 일어나 봐요. 예린아빠"

잠결에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습니다. 머리맡에 놓여있는 핸드폰의 폴더를 열고 시간을 확인해 보니 새벽 2시 30분. 아내를 쳐다보는 불탄의 눈에는 '자다 말고 왜 깨웠어?'라는 질문이 담겨 있었을 겁니다. 거실에 켜놓은 황토메트 위에는 이불을 차낸 채 잠을 자고 있는 두딸의 모습이 눈으로 가득 들어왔습니다. 

"예린아빠, 나 이상해요. 배가 자꾸 아파요."
"화장실 가고 싶은 건 아니고?"
"그렇게 아픈 게 아니에요. 자꾸만 이상해요. 너무 아파요."
"응? 빨리 준비해. 병원에 가보자."

잠자리에 든지 이제 한시간이 채 되지 않은 탓에 비몽사몽이었지만 세수만 대충 하면서 병원에 갈 준비를 했습니다. 어수선한 소리에 잠이 깬 새내기 초등학생 큰딸에게는 엄마가 배가 아파 병원에 가야 하니까 동생과 함께 자고 있으라고, 혹시라도 무서울지 모르니까 방불은 켜놓겠다고 다독거렸습니다.

아이들만 놔둔 채 집을 비워야 한다는 건 무척이나 불안한 일이었지만 새벽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몇분 간격으로 배 아파하는 아내의 암묵적인 채근이 더욱 정신을 없게 만들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산부인과 병원을 가기 위해 잡안 탄 택시 안에서 아내는 아픈 배를 매만지며 큰딸의 출산 때와 통증이 비슷하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큰딸을 출산할 때에도 새벽에 통증을 느꼈지만 예정일이 두달이나 남아 있던 탓에 미련스럽게 아침까지 참았었는데 아침이 되어서야 찾은 동네 병원에서는 이대목동병원을 권유했었고, 결국 신생아용 산소호흡기가 남아있는 이대동대문병원으로 앰블런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안좋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병원 측의 책임은 아니라는 서약서를 작성할 때는 심장이 멎고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았었는데 다행히 그렇게 하얀 눈과 함께 탄생한 1.69kg의 작고 어린 생명은 서너 개의 주사바늘을 이마와 손, 발에 꼽은 채 인큐베이터 속에서 죽음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겨낼 수 있었기에 지금도 불탄과 아내는 큰딸에게 미안하고, 고맙기만 할 뿐입니다.

둘째딸의 출산도 쉬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유산의 위험이 농후했던 탓에 태아를 자궁에 묶어놓는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출산일까지 엄마의 자궁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던 둘째딸의 고생에 생각이 미칠 때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은 마음에 큰딸과 마찬가지로 항상 미안하고 고맙기만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셋째아이가 통증이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거겠지요.

이전 저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예정일이 2주나 남아 있고, 바로 전날에는 병원진료를 통해 아이의 상태에 대한 검진도 받았었기에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3주전 검진에서는 상태가 좋지 않아 이틀 동안 입원한 경험도 있었으니까요.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분만실과 이어진 병실에서 간단한 문진과 진료를 받았는데 갑자기 아내가 배 아파한 것이 산통이었고, 자궁도 조금씩 열려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천만 다행이란 생각에 가슴이 울컥해 오더군요. 3시 30분에 관장을 하고,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는 분말실로 옮겨 갔습니다.

잠시 후 4시 30분 쯤, 아내의 분만을 유도하던 의료진 중 하나가 불탄을 호출하였고, 의료용 수술장갑을 끼워주더군요. 새벽 5시 9분, 아내를 30분 정도 힘들게 하던 아기가 자궁 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나왔습니다. 의료진이 지정해 준 탯줄의 한 부분을 의료용 가위로 잘라낸 불탄은 아내에게 "고생했어, 힘들었어. 예뻐. 잘 했어......"라고 말하며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쓰다듬어주었습니다.

아기의 배꼽에서 이어진 탯줄은 다시 적당한 길이로 잘리웠고, 고무관 처럼 보이는 기구를 이용해 아이가 삼킨 양수를 20분 정도 연신 빨아내고 뽑아냈습니다. 양수를 뽑아내기 위한 고무관 기구를 아기의 구강으로 쉽게 삽입하기 위해 분만도우미가 발바닥과 손바닥을 자극할 때마다 찡그리며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의 모습을 보면서 그저 '고맙다. 고마워, 아가야.'란 말만 속으로 뇌까렸지요.

그렇게 10월 6일 새벽 5시 9분에 셋째딸이 태어났습니다. 큰딸과 둘째딸이 태어났던 날에는 하얀 눈으로 온 세상이 뒤덮혔었는데 3.3kg의 건강한 셋째딸이 태어난 이날 새벽에는 작은 별빛 몇 개가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