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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엄마랑 결혼했잖아요?”
“그랬지. 분명히 아빠는 엄마하고 결혼했지.”
“근데요.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엄마랑 왜 결혼했어요?”
“응. 그건 말이다. 아빠랑 엄마랑 만나면 밤에 서로 헤어지기가 싫을 정도로 사랑했단다. 두 사람이 서로 좋아서 떨어지기 싫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
“잘 모르겠어요.”
“맨날 맨날 같이 있으면 좋겠지?”
“네. 같이 더 놀고 싶은데 못 놀게 되면 슬플 거 같아요.”
“그래. 아빠랑 엄마는 항상 같이 있고 싶어서 결혼을 한 거란다.”
 
눈을 빛내며 자신이 궁금한 것을 묻는 작은딸을 보면서 과연 내가 선택했던 결혼이라는 것이 단지 그런 이유 뿐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같이 있고 싶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맞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기 싫은 것, 포옹하고 있던 가슴을 떨어뜨리기 싫은 것,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집중하고 있던 키스를 끝내기 싫은 것, 그리고 계속 음미하고 싶은 달콤한 분위기를 깨뜨리기 싫은 아쉬움 같은 것일까?


사랑을 느끼고 표현하는 방법은 열 사람이 모두 틀릴 수밖에 없다. 사랑을 정의하거나 명제함에 있어서도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순간의 감정에 따라 달리 말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성간에 느끼는 사랑에 있어서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모습이 시간이 더해 갈수록 또렷해진다. 먹지 않아도 식욕이 생기지 않고, 잠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웃음이 걸린다. 노래의 가사가 모두 내 것인 양 들뜨게 되고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에 내가 투영된다. 영화 속 주인공의 대사에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난다. 바로 그런 모습이 사랑이다.
 
문득 생각이 나는 것이 있어 앨범을 뒤적거려본다. 뿔테 안경에 조금은 촌스러운 화장을 하였지만 나이가 주는 빛나는 젊음이 모든 것을 눈부시게 만들었던 시절, 그때의 아내가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얼굴에는 단 한 점의 불만이나 그늘이 없어 보인다. 함께 있던 나를 향해 유리가 부딪치는 소리와 꼭 닮은 웃음을 터뜨리던 그 때의 아내 모습이 내 눈에 다시 나타난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했던 것이리라.
 
퇴근을 하고 돌아온 아내에게 왜 나와 결혼했는지 물어본다.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물음에 대한 답을 토해낼 생각은 하지 않고 불안해한다. 그냥 자기가 잘못했다고, 서운한 것이 있으면 알아듣기 쉽게 말을 해달라고 한다. 내게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다소 경직되어 있는 내 얼굴이 던지는 느닷없는 질문에 적잖이 당황했던 탓이겠지. 그렇게 우리는 부부로 살아가는 것이리라.


“아니, 그게 아니고. 예진이가 아까 아빠는 왜 엄마랑 결혼했냐고 묻는 거야. 그래서 내가 뭐라 대답을 해 줬는데 나도 갑자기 자기가 왜 나와 결혼했는지 궁금해져서 한 번 물어본 거야.”
 
그제서야 얼굴에 화색이 돌아온다.
 
“뭐예요? 놀랐잖아요. 내가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결혼했지 왜 했겠어요?”
“그니까. 그 사랑이 뭐냐고? 그때 우리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그 사랑이라는 것이 대체 뭘까 싶어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랑이 사랑이지, 사랑에 뭔 다른 뜻이 있어요?”
“응? 사랑이 사랑인 거... 라..?”
 
듣고 보니 그렇다. 사랑이 사랑인 거지 뭔 놈의 다른 타령을 늘어놓을 수 있으랴 싶다. 아내의 말을 몇 번씩이나 다시 곱씹어 봐도 트집거리를 잡을 수 없다. 그래. 사랑이 사랑인 거지 더 무얼 갖다 붙이겠는가?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인 것이다.
 
벌써 결혼생활 12년을 넘겨버린 중년의 남자가 이제 와서 사랑의 의미가 뭔지 따져서 무에다 써먹겠는가? 그저 지금처럼 이렇게 살아가고, 채워가고, 버려 가면 되는 것을..... 그리고 오늘을 감사하고, 내일의 소망하고, 과거를 추억하는 그 자체가 바로 인생인 것을...... 지금까지 잠시 덧없다 생각했던 시간들도 돌이켜 보면 이렇게 인생의 한 부분이었던 것을 오늘에야 득도한 고승이 된 것처럼 알싸하게 전해온다.

그렇게 시간은 간다. 세월도 간다. 그 열정으로 피어났던 사랑도 간다.

그럼에도 한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랑이라는 놈은 묵히고 삭힐수록 익어간다는 거다. 묵은지처럼, 젓갈처럼 오늘도 그런 사랑을 마음의 한켠에 밀봉해 놓은 채 묵히고 삭혀가야 하는 거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