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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갑자기 80년대의 영원한 오빠가수의 노래 한 소절이 귓가를 간질인다.

운명이 뭘까?
이 노래를 통해 말하려 했던 운명이란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과연 운명이라는 게 ‘이거다!’라고 자신 있게 명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그래도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 한사코 일러 달라 보챈다면 지금의 나로서 할 수 있는 답이라는 것은 마땅히 없다. 아직 그 개념 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주변머리를 가지고 어찌 그토록 쉽고도 경박하게 한마디의 말로써 정의(定義)할 수 있으랴.

그래도 한 가지, 내가 생각하는 운명으로서의 사랑은 소설이나 영화가 그려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마흔을 훌쩍 넘기고 있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비유를 할 만큼의 소감이 아직까지 내게는 없기 때문임에야.


이미지 출처 - 경향신문

아프리카에 가본 적도 없다. 또한 눈으로 직접 표범을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이 노래 가사에서 불탄은 조롱하듯 간질이는 상상으로서가 아니라 적어도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순수한 동경 만큼은 가지고 있다.

분명 가늠하지는 못하고 있을지라도 운명을 거론할만한 사랑 정도는 누구나 한번 쯤 경험했을 터이다. 그 경험들은 이야기가 되어 회자되고, 노래가 되어 불려진다. 소설이 되어 전파되며, 때로는 영화가 되어 파급되기도 한다.

누구도 동일한 상황의 사랑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슷한 경험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에 동감 또는 공감을 하고, 그 노래를 따라 부른다. 그 소설에 잠을 설치며, 그 영화에 눈물을 흘린다.

그게 바로 사랑이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하게 된 수많은 꺼리들은 눈을 통해 입으로 전달되고, 그 입이 움직여 타인의 귀로 흘려보내게 된다. 하나의 스토리가 정착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시인은 이렇게 얘기했다. "누구나 삼류소설 한편쯤은 가슴에 담아놓는 법"이라고.

오늘을 살아가는 지금의 나는 누구나 겪었을 그렇고 그런 사랑이 모두 운명을 걸만큼 소중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름대로의 절박함과 피 말리는 고통은 있었겠지만 실제로 한 지붕 아래에서 한 솥에 밥을 해 먹고, 한 이불 속에서 잠자리를 하고, 함께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지금의 이 사랑이야말로 진정 운명을 함께 했고, 지금도 함께 하고, 앞으로도 함께 할 사랑이라 믿으니까.

그럼에도 "쎄~"하는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바람이 있어 텅빈 가슴이 안쓰럽다. 아마도 보고 있으리라. 닿지 않는 시선임에도 끝까지 놓지는 못하리라. 세월의 무게를 지어감에 따라 손으로 눈물까지는 훔치게 될지라도 커지는 그리움까지는 차마 속이지 못하리라.

적어도 내가 하는 사랑은 외롭지 않다. 아무리 운명을 걸기 때문이라도 외로울 수가 없다. 노랫말이 전하고 있는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은 사랑의 열정이 아니라고 외치고 싶다. "모든 것을 잃고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 역시 세차게 도리질하며 부정하고 싶다.

사랑은 이별의 기운마저도 꺾을 수 있는 열정이며, 모든 것을 잃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주기 때문에 결코 후회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P.S 본 포스트는 불탄이 운영하고 있는 네이버 블로그에 올렸던 "[에세이]땅콩 껍질 속의 사랑 V2 - 15화 / 2009. 10. 21."를 재편집하여 발행한 글입니다.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