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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잡기 위해 서있던 그는 뭐라 할 수 없는 당혹감에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자존심을 죽여 가며 함께 있었건만, 그녀는 지금 택시 승강장 앞에 설치된 낮은 바리게이트를 붙잡은 채 조금 전까지 자신이 무엇을 먹었는지에 대해 조금도 궁금해 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오바이트라는 수단을 통해 모조리 까발리고 있었다.

시작은 회식장소였던 횟집이었다. 소주와 맥주가 몇 가지 횟감과 함께 테이블에 깔리기 시작하자 업무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 직원들은 각자 서로의 잔에 술을 채워가면서 ‘원샷’을 부르짖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오늘의 자리를 마련한 오너는 가식적인 웃음을 얼굴에 퍼뜨린 채 사기진작과 팀워크를 강조하면서 연거푸 몇 번씩이나 건배를 제창했었다.

누가 그랬던가? 여자 치마와 설교는 짧을수록 좋다고. 오너의 지루한 건배제의가 끝나자 자리에 있던 직원들의 얼굴에는 금방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깔고 앉은 방석에 이름표라도 달려있는 것처럼 움직임이 없던 직원들도 몇 순배 술잔이 돌자 점점 용기를 내면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마도 술이 만들어 준 분위기가 이성이 지켜온 처세를 짓누르는 모양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동료에게 자신의 술잔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나마 처음에는 각자가 상대에게 내미는 술잔에 혹시나 남아있을지 모를 입술 자국을 형식적이나마 닦아내는 시늉이라도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예의는 사라져갔다.

원샷의 파도타기도, 은밀하게 테이블 밑으로 서로에게 손길을 주면서 남모르는 정취를 느꼈던 스릴도 이제는 잠시 멈춰야 할 시간이 왔다. 어느 정도 흥이 올라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오너가 2차를 제안했다. 횟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칵테일 바라는 것은 십중팔구 여직원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오너의 고육지책이었으리라. 몇몇은 어느새 눈이 맞았는지
연인이나 되는 것처럼 서로의 가방을 챙겨주기도 하고, 먼저 바닥으로 내려와 신발을 내어주기도 하였다. 그런 모습 자체가 술이 만든 행동이었기에 스스로가 의식을 못하는 것도 있었겠지만, 함께 자리한 일행들 역시 미처 이상하다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고 사소해 보일 뿐이었다.

안주로 나온 과일은 고역이었다. 잔이 필요 없는 조그만 병맥주를 들이킬 때마다 옆에 찰싹 달라붙어 유독 그의 입에만 포도를 넣어주는 그녀는 이미 취해 있었다. 그 모습이 일행의 눈에는 분명 이상해 보였겠지만 그도 의식이 되어 일부러
화장실을 다녀오기도 했다. 꼴에 싸구려 버번위스키에 콜라를 섞은 칵테일 한잔이 무슨 대단한 것이라고 되는 양 홀짝거리던 그녀는 테이블에 올려놓은 팔꿈치로 이마를 짚은 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는데 조명 때문이었는지 그녀의 눈망울에 물기가 살짝 비치는 것처럼 보였다.

분위기가 급격하게 가라앉을 때 쯤, 젊은 직원들이 나이트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자주 마련하지 못한 회식자리라 생각했는지 오늘은 오너가 그 뜻을 호기롭게 받아 들였다. 제법 그 방면에 밝아 보이는 직원 하나가 이 지역에서는 가장 물이 좋다고 침을 튀겨가며 안내한 나이트 입구에는 떡대 좋은 청년 둘이서 우리를 막아섰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그렇듯이 몇 장 쥐어준 지폐는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비어있는 룸으로 안내하도록 만들었다.

꼬리는 뻗는 것이 아니라 마는 것임을 일찌감치 체득한 고참 사원들은 오너의 분위기를 살피며 최대한 즐길 수 있는 모드를 선택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이제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들은 나름대로 선배들로부터 배운 처세술을 써먹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직원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 오너는 웨이터를 불러 지금까지의 술값을 계산하고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것처럼 보이는 두툼한 봉투를 막내 신입에게 건네주었다.

다시 광란이 찾아왔다. 회사에서 가장 어려운 오너가 자리를 뜨자 마음이 편해진 직원들은 저마다의 쾌락에 빠져 들었다. 남녀 비율이 맞아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파트너를 맞출 수 있었지만 자정이 넘어가면서 여직원들은 하나 둘씩 귀가를 하기 시작했고, 막내 신입은 그때마다 그녀들에게 택시를 잡아 주면서 넉넉하게 택시비를 쥐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직원의 빈자리는 웨이터가 억지로 이끄는 부킹녀들에 의해 순간적으로 채워지기는 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직원들은 수컷의 본능을 살려 이리 저리 기웃거리며 짝짓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고, 몇몇 직원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독한 위스키를 온더락스로 얼음이 담긴 잔에 한 잔 따라서 목으로 넘기고 있을 때 아까부터 촉촉한 눈으로 질척하게 따라붙던 그녀가 자리를 옮겨 그의 곁으로 가 앉았다. 회사에서 그녀를 본 기억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하며 억지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부서가 틀려 눈에 익지 않은 얼굴이지만 가끔 직원 휴게실에서 동료들과 음료수를 뽑아 먹는 모습은 본 것도 같았다. 유난히 긴 목에 하얀 피부가 인상적이었고, 고개를 젖혀 음료수를 마실 때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번 쯤은 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는 하나 한 번도 정면으로 그것도 가까이에서 얼굴을 볼 수 없었기에 환상인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조금 전에 같은 부서 여직원과 직장이 어떠느니, 여성 인권이 어떠느니 하고 목에 핏줄을 세웠던 모습이 떠올라 살풋이 웃음을 지었다. 브루스를 추자고 하면서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는 직원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동료의 질문에 그녀는 “어머, 별꼴이야. 그래! 그런 놈들을 그냥 둔다는 것은 내 스스로 인격을 포기하는 거야. 아예 이번 기회에 콩밥을 먹여줘야 돼.”라고 흥분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런 모습은 진작에 내게 대하는 것과는 이상하게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고객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입술로 가져가는 술잔을 들고 있는 손도 초점을 잃고 있었다. 지금 가볍게 누군가가 손을 내민다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끈끈한 욕정도 쉽게 풀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슬쩍 반응을 살피기 위한 멘트를 던져 보았다.

“오늘 이상하게 힘드네요. 답답하기도 하고요. 탁 트인 곳에서 바깥공기를 쐬고 싶은데 어때요. 같이 나가실래요?”
“둘이서 만요? 나중에 사람들이 뭐라 그러면 어쩌려고요?”

이런 여우같은 것. 우리가 지금 뭘 하려는 건데? 그냥 술이 올라서 집에 갔다고 하면 되잖아. 그리고 함께 나간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말야. 그럼 하나 더 찔러볼까?

“둘이서만 나가지 그럼 누구랑 같이 가게요? 싫으시면 그냥 저 혼자 갈께요.”
“알았어요. 오래는 같이 못 있어요. 술이 깰 때까지 만요.”

그래? 그럼 술이 취해서 지금은 뭘 해도 괜찮다는 말인 거야? 뭐야. 감을 못 잡겠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찔러보자.

“술은 어지간히 된 것 같은데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요? 걷거나 서있기도 힘들 것 같은데.”
“아. 알아서 하세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나중에 쉬운 여자였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뭐. 그냥 가자는 얘기네. 마음대로 하라는 얘기고. 아무튼 오늘은 재수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뒷걸음치다 똥을 밟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자에게 찍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 나는? 나는 이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그냥 욕정을 풀 수 있는 하룻밤 여자? 내일도 회사에서 봐야 하는데. 그래도 겉으로 풍기는 걸로 봐서는 절대로 싸구려는 아닌 것 같아. 확실해. 에이! 나도 모르겠다. 어이. 아가씨, 나도 잘 모르겠다고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가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재빨리 그녀의 왼쪽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자세를 바로 주고 나서 휘청거리는 걸음을 억지로 옮겨가며 밖으로 나오니 저 앞쪽 빌딩 사이로 모텔처럼 보이는 붉은 조명이 눈에 띄었다. 불과 2~3분 정도의 거리나 될까? 자세를 바꿔 그녀의 왼쪽으로 돌아들어가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안아들면서 방향을 잡아 걸어갔다.

몇 걸음이나 움직였을까? 갑자기 그녀의 고개가 들리더니 불똥 맞은 강아지 마냥 도로변으로 달려 나간 그녀가 한 행동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그녀에게 기대를 했던 마음과 공들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밤하늘의 달보다 훨씬 밝은 가로등을 쳐다보면서 그녀의 오바이트가 멈추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는 어느새 옷 매무새를 갖추고는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고, 허허롭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뒤통수로 들이치는 서늘한 찬바람에 부르르 온 몸을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  090819. 불탄(李尙眞)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