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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다는 건 뭔가? 보고픈 마음에 흘리는 눈물은 피보다 검붉을 수밖에 없다. '가질 수 없다'라는 절망감은 '절절하다'라는 말의 또다른 표현이려니.

눈이 내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보는 오늘이다. 그녀의 지난 번 만남에서 약속했던 날도 바로 오늘이다. 허나 오늘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만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벌써 그녀와의 네 번째 만남이 되는 날이던가? 만나는 동안에도 기억에 남는 대화가 지금껏 하나 없으니 도대체 뭘 했나 싶기도 하다. 그저 부끄럽고 조심스런 마음에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기만 했던 것 같다. 가끔 눈빛이 서로 부딪치기라도 할라치면 겸연쩍은 웃음만 '씩~'하고 유성처럼 지나갔을 뿐.

그녀는 잔인한 여자다. 가까이 갈 수 없도록 철저히 무장을 갖춘 채 방어를 하고 있으면서도 헤어질 시간이 되면 여지없이 다음 번 만남을 약속한다. 그 일방적인 통보성 약속에 서서히 길들여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는 했지만 그로서는 따로이 취할 방법이 없다. 오늘도 지금까지의 만남이 그랬던 것처럼 길거리 레코드 가게 앞에서 발만 동동구르며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왠일로 오늘은 그녀가 약속시간보다 늦지 않았을까? 저 만치에서부터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 오도카니 서있던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싱긋 웃음을 흘려보낸다. 이미 넷 에움은 어스름 녘이었던지라 금새 웃음은 얼음이나 된 것처럼 조각으로 떨궈지며 "바스락" 소리를 내고 있다.
 
"일찍 왔네?"
"많이 기다렸니?"

그가 묻는 말에 또다른 물음으로 대답을 하는 그녀였다. 이제는 익숙한 대화법이 되었으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또 한번 얼음 같은 웃음을 흘릴 수밖에.

"어디 따뜻한 곳에 들어갈까?"
"......"

'어디로?'라는 질문을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으로 대신하던 그녀의 턱이 앞쪽으로 까딱댔다. 앞장 서라는 뜻이겠지. 늘 그랬던 것처럼 음악다방은 담배연기와 커피향이 섞여 이상한 느낌을 전해준다.

경향신문 1985. 01. 29

여종업원이 내려 놓은 엽차는 적당히 따뜻했고, 촌스러운 메모지와 모나미 볼펜은 낮은 조명 아래에서 흔들린다. 습관적으로 듣고 싶은 음악 몇 개를 적은 메모지를 여종업원에게 건네며 커피 두 잔을 주문해 보지만, 자리에 일어날 때까지 설탕과 프림을 타 넣기만 할 뿐 테이블 위에 놓여진 그 커피잔에 단 한 번의 입술이 닿지 않으리라는 걸 그도,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사실은......"
"응?"

왠일로 그녀가 오늘은 먼저 말문을 열고 있다. 무슨 말인지 빨리 해 보라는 재촉의 뜻을 담긴 그의 눈빛에는 '저 조그마한 입을 통해 듣게 될 말이 과연 뭘까?'하는 궁금함이 묻어있다.

"이거 줄려고......"
"이게 뭔데?"
"응. 그냥...... 좀 있다 나랑 헤어지고 난 담에 풀러봐야 돼?"
"알았어."

그가 신청한 음악 김승덕의 "우리사랑"이 흘러나온다. '저 지긋지긋한 섹소폰 소리, 흐느끼는 듯한 절망스러움이 너무나 싫다. 허나, 이제는 중독이 되어버렸다. 하루라도 거르게 되면 손발이 떨린다는 알콜중독자 처럼 매일 같이 저 저주스러운 노래를 들어야만 안정이 된다. 이게 다 이 여자 때문이겠지?'

디제이의 손길이 다른 LP판으로 교체하려는 순간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다. '오늘은 여기까진가? 그래도 오늘은 그녀가 사용하는 샴푸의 이름이나마 알아낼 수 있었군.'

늘 그렇듯 걸음을 옮겨 레코드 가게 앞에서 멈춘다. 그곳이 바로 그와 그녀가 늘 만나고, 헤어지는 장소다. 그녀가 그를 향해 손을 내민다. 참 별스러운 날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준다. 뭔가 아쉬운 듯한 그녀의 눈빛을 본 그는 무의식중에 그녀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앞으로 당기니 그녀가 쉽게 이끌려 온다. 가볍게 그녀를 가슴으로 꼭 안아준다. 살짝 붉어진 볼우물에 덧니를 살짝 드러내며 그녀가 낮게 속삭인다.

"너, 정말 괜찮은 애야. 그리고 내가 오늘 같은 선물을 준비한 건 니가 처음이야!"

골목에 내린 짙은 어둠이 그녀를 완전히 삼켜버릴 때까지 그는 그녀가 사라진 곳만 응시하고 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길을 건너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 그는 그녀가 준비했다는 선물을 풀러 보기로 했다.


하트 모양의 새빨간 케이스에는 예쁘게 줄을 맞춘 술병 모양의 초콜릿이 담겨 있다. 가장 예쁘고 큰 놈으로 하나 꺼내 입안에 넣으니 얼마 안있어 '퍽~' 하니 뭔가가 입안에서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온 입안에 가득히 퍼지는 뜨거운 기운.

'위스키가 들어있었나 보다.' 그것도 샴페인 처럼 약한 도수가 아니라 진짜로 독한 양주. 소주 세병을 마셔도 취하지 않던 그가 초콜릿 속에 들어있는 그 눈곱 만큼의 위스키에 취해간다는 사실에 어이없어한다.

'난 위스키에 취한 게 아냐. 그렇다고 우리사랑이란 노래가 흘려낸 섹소폰의 질척거림에 취한 것은 더더욱 아냐. 포기할 수 없도록 아주 조금씩 내 감정을 갉아먹고는 있지만 결국 그렇게 체념할 수밖에 없게 될 이별에 취했을 뿐인 거야'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