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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유동근·황신혜 주연의 16부작 월·화 드라마 "애인"이 큰 인기를 끌면서 사회적 이슈를 만들었던 적이 있다. 아마 1950년대 중반 "자유부인"으로 당시의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상황 만큼이나 가정을 갖고 있는 남성과 여성에게 많은 논란을 낳게 하였던 드라마로 기억한다. 숨어있던 욕구을 발산시키는 일종의 분출구로서 작용하였던 이 드라마를 나는 한번도 제대로 본 적은 없었지만 이런저런 자리에서의 귀동냥을 통해 얼마나 많은 화제를 뿌렸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다.

애인(愛人)!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이는 말이다. 예전에는 정인(情人)이라는 말로써 표현했었으리라.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묘한 감정을 증폭시키고 있는 "애인"이란 존재는 어떤 것일까?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일상에서 삶의 엔돌핀을 제공하는 존재일까?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가장 강력한 선물일까? 아니면 타인에게 성적인 우월감을 내세우기 위한 과시용 액세서리일까?

"애인"이란 존재는 미혼인 경우나 기혼인 경우나 갖고 싶은 하나의 환상같은 것이다. 특히 미혼의 경우에는 결혼을 함께 설계하고 있을 때 긴밀한 유대감이 더 커지는 존재이다. 자유연애주의의 관점에서는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전제로 한 엔조이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혼의 경우에는 어떨까? 지금의 배우자가 언제까지나 애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감정의 흐름이라는 것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내 가슴에서 흘러 배우자가 아닌 이의 감성으로 스며들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다만 도덕적 신념과 책임감, 배우자에 대한 배려, 그리고 뭐라 이름짓지 못할 부담감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고 엉켜있기 때문에 대놓고 드러내지 못한 채 외면할 수밖에......


"애인"으로의 성숙은 "친구"나 "아는 오빠, 동생"에서부터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에는 연상연하 커플도 일반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아는 누나, 동생"에서 출발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어느 정도의 교제기간을 갖게 되면 자연스러운 스킨십과 서로에 대한 소유욕이 형성되는데 이 때 비로소 "우리 친구하지 말자" 나 "나 더이상 네게 오빠(동생)이고 싶지 않아" 정도의 표현을 나타내면서 주변의 사람에게 "인사해, 내 애인이야" 라고 소개하게 된다.
 
그럼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지금까지의 그냥 "아는 사람"이 "애인"이 되는 것일까?

"아는 사람"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면 닦아주고 싶고, 이유없이 함께 울고 싶어질 때... 공원이나 길을 거닐 때면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고 싶어질 때... "아는 사람"이 이성친구와 단둘이서 영화를 본다거나 도서관을 간다거나 여행을 간다고 하면 갑자기 나도 모르게 얼굴이 벌게지면서 화를 내게 될 때... 우연히 커피숍이나 TV, 라디오에서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때... 어떤 맛있는 음식이 앞에 보이면 "그 사람, 이거 디게 좋아하는데..." 하면서 혼자 먹는 것이 미안해 질 때...

무슨 무슨 데이라고 하는 날이면 "나도 그 사람에게 남들처럼 선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면서 망설이고 있을 때... 내게 아주 기분 좋은 일이 생기면 무의식 중에 그 사람에게 문자를 날리고 있을 때... 가끔씩 보는 드라마나 영화의 남·녀 주인공을 나와 그 사람으로 착각하면서 보고 있을 때... 저녁이나 술이라도 한잔 함께 하는 날에는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너무 늦은 시간에도 서로가 떨어지기 싫을 때... 무슨 걱정거리가 분명히 있어 보이는데 내게는 말하지 않고 있는 그 사람이 야속해 질 때... 내게 무슨 걱정거리가 있어도 그 사람이 알면 부담될까봐 이야기하지 않을 때...

뽀뽀하고 싶을 때... 포옹하고 싶을 때... 그냥 그 사람의 웃는 얼굴이 무작정 좋을 때... 이 글을 읽으면서 지금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때...

그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애인"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2008년 11월, 불탄이 운영하고 있는 네이버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다듬어 재발행한 포스트입니다.
오른쪽 링크를 따라가시면 원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링크]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