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가 총 맞던 그시간 - 심수봉 '그때 그사람'
궁정동의 총소리, 그때 그사람
- 현장언론 민플러스, 심수봉 : 그때 그사람 '78 MBC 대학가요제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뉴스는 많은 국민들에게 충격이었다. 전 세계의 독재자들은 언제나 박정희를 그리워했다. 철권통치의 장기독재를 이어오면서도 나름 경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듯한 모습이 독재자들의 새로운 롤모델이었다. 오죽하면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는 박정희가 죽던 날, 밤새워 울었다고 한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의 모델은 실제로 4.19혁명 뒤에 만들어진 장면 내각의 경제개발계획을 그대로 차용했다. 그러나 제2공화국의 경제발전계획은 그 빛을 보지 못했고,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박정희는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끈 대통령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 성공이 독재자 박정희를 근대화의 기수로 만들어줬고 지금까지도 박정희에 대한 공과를 얘기하면서 항상 치열한 대립선상에 놓이게 하는 명분이 된다.
70년대 말 그의 장기독재는 전 세계적인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대한민국 경제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유신선포 이후 철권통치로 정치적 정당성을 잃어버리면서 더 이상 국가를 지탱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있던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의 부당성은 국제적으로 김영삼의 미국신문과의 인터뷰 속에서 “미국은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라는 발언으로 국회에서 제명됐고, 카터행정부는 박정희를 반인권주의자로 인지하고 대한민국에 대한 일정한 경제봉쇄를 가하기 시작했다.
국내적으로는 YH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야당과 재야가 반박정희 정서로 뭉치게 됐다. 그리고 김영삼 의원의 제명 이후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 이후 최초로 정권퇴진운동이 시작되면서 정권의 부도덕성은 날로 높아지게 됐다.
국민들의 반독재 투쟁에 총칼을 앞세운 강제적 진압으로 정권을 유지하던 박정희는 그의 마지막 공식행사인 당진의 삽교천 방조제 조성식을 마치고 헬기로 돌아와 궁정동 안가에서 자신의 측근인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과 술을 마시던 중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세인의 관심을 받은 건 그 자리에 동석했던 여인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 안가에서 노래를 불렀던 젊은 가수가 세인들의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1977년 처음 시작된 대학가요제는 대학과 가요라는 두 가지 문화를 하나로 압축한 것이었다. 대학생 둘 이상만 모여도 해산시키던 시절 대학생들의 가요제라는 것은 무리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대학가를 중심으로 진행된 반유신 데모를 TV의 보급으로 대중화된 문화로 되돌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따라서 당시 대학가요제는 젊은이의 축제라는 이름을 띄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는 관제가요제 같은 이미지를 지울 수 없었다.
2회를 맞은 78년 대학가요제에서 새롭게 부상된 스타는 대상을 받은 ‘썰물’보다 피아노 앞에서 대학생들의 노래와는 약간 거리감 있는 트로트를 불렀던 젊은 여성이었다. 당시 이 가수가 부른 노래가 ‘그때 그사람’이었다. 대학가요제를 통해서 이렇게 해성처럼 등장한 가수가 바로 심수봉이었다.
그러나 심수봉은 대학가요제에 등장하기 이전부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특이한 음색으로 주목을 받았던 심수봉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인 박선호의 눈에 들었고 대학가요제 이후 박정희가 심수봉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10월 26일 만찬에 심수봉을 부른 것이었다.
당시 최고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TBC의 쇼쇼쇼에 출연하기로 돼있던 심수봉은 박선호의 전화 한 통화에 출연을 연기시키고 궁정동으로 달려간 것이다.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던 심수봉은 이후 가수 심수봉이 아닌 박정희의 심수봉으로 가수 활동을 한동안 중단해야 했다. 그리고 당시 불렀던 그녀의 노래 ‘그때 그사람’은 80년대 대학가에서 유행한 노가바 -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 당시의 인기곡들의 가사를 사회부조리나 독재를 비판하는 가사로 바꿔 부름 - 의 애창곡 중 하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