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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88과의 인연


1987년 대학교 2학년 재학시절, 교련 과목의 2학기 과정인 전방교육을 떠날 때 팬티와 수건보다 더 많이 챙겼던 것이 바로 담배 88이었다.
그 당시에는 대학교에 교련과목이 있었는데, 1학년은 문무대 교육을 그리고 2학년은 전방교육을 수료해야만 했다. 물론, 나중에 현역으로 복무하게 되면 3개월의 군복무 단축 혜택이 주어졌다. 단기사병인 경우에는 21일의 단축혜택이 주어졌고...
 
그런데 왜 그 당시에 담배를 그리 많이 챙겨갔던 걸까?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전방교육을 편하게 받기 위해서였다.
 
당시 불탄은 강원도 양구에 있는 삼각산부대로 전방교육을 가게 되었다. 과선배나 동문선배의 귀띔을 통해 GP근무를 서는 현역병인 경우에는 6개월 동안 면회나 외출, 외박이 안 되기 때문에 사제담배가 아주 인기가 많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사제담배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그것도 이제 막 출시되기 시작한 88 담배로 준비했던 거다. 서울에서 개최하는 88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막 출시되기 시작한 붉은색, 파란색, 녹색의 3색 3종의 바로 그 88 담배를 말이다.
 
※ 불탄의 예전 포스트 아직도 담배 88을 피우세요에서 인용
ciga_88
담배 88라이트
 
주점이나 커피숍, 당구장 등에서 손님들을 위해 담배를 갖춰놓을 때가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리 오래 전의 일도 아니다. 어디에서건 "여기 담배 하나 주세요!" 하면 종업원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가던 게 바로 '88라이트'였다. 물론, 그 이전에는 하얀 바탕에 빨간색 소나무가 그려진 '솔'이라고 하던 담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솔'은 군용 담배로 지정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고, 사제 담배로서의 대표자격을 '88라이트'에게 넘겨주게 되었던 거다. 결국 군용담배가 된 '솔' 때문에 피를 본 것은 그때까지 군용담배로 생명줄을 이어가고 있었던 '백자'였음에야.
 
담배 88라이트의 단종
 
그로부터 24년 정도가 지났나 보다. 2011년 7월 16일 현재, 담배 88라이트가 공식적으로는 단종되어 있는 상태다. 담배 88이 처음 나왔을 때 모습을 보였던 빨강 담배는 언제 단종되었는지도 모르게 소리소문 없이 없어지더니만 88멘솔과 88골드, 그리고 일반 담배보다 조금 길었던 88디럭스마일드도 단종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마지막으로 88라이트까지 단종된 거다. 사실 단종의 소식은 지난 달부터 들려왔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얘기겠지만 늘 편의점이나 담배를 파는 동네수퍼에서 88라이트를 구입하는 불탄의 귀에 이 같은 소식이 들리지 않을 수 있었으랴.
 
ciga_88
불탄 아닙니다. 인터넷 이미지

 

단종시키는 이유는 간단했다. 일부 사람들만(어쩌면 이것도 88 마니아라 할 수 있을까?) 찾기 때문에 어지간한 담배판매점에서는 이미 100여종이 넘는 다른 담배들만으로도 벅차다는 거다. 아무래도 2,500원 이상 하는 담배들 중에서 1,900원을 하는 이 담배가 담배판매점으로서는 달가울 리가 없었을 테고. 게다가 판매가격도 제일 싸니 팔아서 남길 수 있는 수익에 있어서도 다른 담배에 비해 적었을 거란 예측은 쉽게 해 볼 수 있잖은가.
 
그렇게 이해는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만큼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이젠 정말로 '88라이트'의 단종을 인정하고 그에 걸맞는 이별을 감내해야 할 때다.
 
혹시나 남아있을 88을 찾아서
 
지난 달 중순 경, 근처 담배판매점을 전전긍긍하면서 미리 사들였던 '88라이트 16갑'을 다 피웠다. 마지막으로 어느 곳에선가 한두 갑이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안고 '88라이트 찾아 삼만리'(라고 쓰고 동네 한바퀴라고 읽는다)를 했다. 편의점마다 다 들어가 봤다. 그때마다 '이 사람 바보 아냐? 이미 단종된 걸 왜 지금 와서 찾는 거지?'라는 의미로 내쏘는 눈빛을 감당해야 했다. 동네수퍼도 마찬가지였고, 담배를 취급하고 있는 마트도 매일반이었다.
 
아내에게도 SOS를 날렸다. 이번에 구하게 되는 담배만 피고 금연하겠으니 담배취급점이 보이는대로 들어가 보고 한두 갑이라도 있으면 꼭 구해달라고. 스스로가 생각해도 한심한 일이었지만 24년을 한결같이 끼고 살아온 것이 88이다 보니 마음 먹는다고 쉬이 끊지 못하겠는 걸 어찌하랴.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지난 수요일 저녁에는 행운의 번호 7, 7갑의 88라이트를 구할 수 있었다. 이미 금연을 했거나 집안에서 누군가의 금연을 애타게 원하는 분들이거나 애당초 흡연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기가 찰 노릇이겠지만 그래도 당사자인 불탄으로서는 나름 감격에 겨워했던 것 같다.
 
성질 더러운 놈이 금연에 성공한다는 말, 진짜다.
 
2011년 7월 16일 점심 때가 다 되어가고 있는 지금 현재,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88라이트'가 4갑 남았다.
 
ciga_88
담배 88라이트
 
흡연을 위해 뜯어낸 것 1갑과 두세 가치나 들어있을 초라한 담배갑 하나도 꼬깃한 빈갑과 함께 남아있다. 이렇게 사진에 모습을 드러낸 것들이 불탄에게는 마지막이 되겠지.
 
이 담배만 다 피게 되면 이후부턴 금연이다. 성질이 더러운 탓에 다른 담배에다 다시 입맛을 맞추거나 할 생각을 갖지 못한다. 그냥 24년을 한결같이 애용했으니 단종이 되는 거라면 응당 함께 끊어줘야지 싶은 거다.
 
그런데 새 담배 한갑 만큼의 시간은 더 단축시켜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나름 기념이 될 것 같으니 온전한 것 하나 정도는 남겨둬야겠지. 혹여라도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엔가 88올림픽 관련 기념품이 다시 재조명을 받게 된다면 살짝 꼽사리라도 한번...
88라이트의 단종, 아쉽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건강을 생각해 보면 잘된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라도 금연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혹시, 어렵사리 마음 먹었는데 황당하게 '88라이트'의 부활 소식이 조만간에 들리게 되는 건 아닐 테지? - By 불탄 2011.7.19 PM 12:25
Posted by 불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