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학번의 기억, 1987년 그해 6월은 뜨거웠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86학번 불탄, 지금껏 살아오면서 1987년의 6월 만큼이나 뜨거운 여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도심 곳곳에서는 꽃병(화염병)과 투석이 난무했고, 전경이 쏘아올린 최루탄은 시위대뿐만 아니라 도로를 걷는 일반 보행자들을 향해서도 쉴 새 없이 쏘아졌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참여했던 6월항쟁은 전두환의 '호헌선언' 발표와 민주화의 크나큰 이슈였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맞물려짐으로써 촉발된 거대 국민항쟁이었습니다. 특히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국민적 분노를 자아내기에 너무나도 충분했고요.
1987년 1월 14일에 발생했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 학우가 경찰에 연행, 물고문을 당하던 중 사망한 사건이었습니다. 공안당국이 필사적으로 체포하려 했던 박종철 학우의 동아리 선배였던 박종운의 행방을 추궁하던 중이었다지요.
다음날, 중앙일보는 "경찰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책상을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발표를 아무런 논조 없이 그대로 실었습니다. 개도 안 믿을 뻔한 거짓말을 경찰이 했던 것이고, 중앙일보는 착실하게 받아쓰기를 했을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기세였고, 급기야 민주화를 염원하는 전국의 학생과 각종 단체는 "故 박종철 군 범국민추도회"를 개최했지요. 공안당국 역시 서슬퍼런 공권력을 앞세워 시위대와 맞서기에 총력을 다했습니다.
이후 학생들과 재야단체, 야당정치인, 종교계 인사들은 모 라면 CF에서나 볼 수 있는 "형님 먼저, 아우 먼저"하는 장면이 전두환과 노태우 사이에서 대통령직을 놓고 자행되고 있음에 반발, 거리에서 명동성당에서 향린교회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개헌 쟁취하자', '파쇼정권 물러나라' 등의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쳐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26년 전 오늘, 서울 잠실체육관에서는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서울시청 부근에서는 시위대의 격렬한 저항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동차 경적시위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나중에 듣기론 전두환이 부산지역의 군 병력 투입 명령까지 내렸었다고 하니 당시 부산지역의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더랍니다.
1987년 6월
한편, 연세대 앞에서는 6.10 출정식을 하루 앞두고 시위에 한창이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안타깝게도 전경이 쏘아올린 최루탄을 맞은 연세대 이한열 군이 피를 흘리며 친구(이창종 군)에게 부축을 받게 되었고, 이 장면을 촬영한 사진은 언론을 통해 전 세계에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이한열 최루탄
6월이 더 이상 뜨거울 수 없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용광로나 마그마나 되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들끓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국민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에게 받아낸 6.29. 항복선언이 바로 그 증거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노태우는 직선제의 즉각 수용, 김대중의 사면복권, 모든 양심수의 석방, 언론자유 보장 등 총 6개항에 이르는 제안을 전두환에게 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6월은 뜨겁습니다. 피 끓는 6월의 함성이 지금도 귓가에 울리는 것도 그 때문인가 봅니다. 당시 민주화의 열망을 마음껏 발산했던 불탄도 어느새 지금은 마흔 중반이 되어 있습니다만, 1987년의 6월은 불탄에게도 또 같은 시기를 살았던 86학번 모두에게도 특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때의 열정을 앞으로 얼마나 더 가슴 속에 담고 살아가게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의 심정으로는 결코 잊지 못할 기억일 뿐만 아니라 절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라 단언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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